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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한국 성씨의 뿌리

순천김씨 시조 김총의 동원재와 묘소

by 안천 조각환 2025. 3. 21.

순천 김씨(順天 金氏)는 전남 순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토종 성씨이다.

시조 김총(金摠)은 후삼국시대에 태어나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을 도와

관직이 인가별감(引駕別監)에 이르렀으며, 많은 공을 세워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순천 본관으로 삼았으며, 평양(平陽)은 순천의 별호이다.

 

순천김씨 시조 재실 동원재(同源齋) 전경

 

시조 김총(金摠)은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라김씨선원록서(新羅金氏璿源錄序)" 등에서는

"태봉국 태자 청광보살(靑光菩薩)의 아들로 궁예(弓裔)의 장손(長孫)",

태봉왕 궁예 왕손라고 되어 있으나 인정에 대한 찬반 양론이 있으며,

참고로 궁예는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지지를 받고있다.

 

동원재 정문인 숭상문(崇尙門)

 

김총은 순천지역에서는 진례산의 산신인 순천성황신(順天城隍神)으로

모시는 사당이 있었으며, 마을수호에 공이 큰 고을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천(順天)의 지명은 함평, 승평(昇平), 승주(昇州), 순천(順天)으로

바뀌었으며, 별호는 평양(平陽)이고, 1413년에 순천 도호부가 되었다.

 

동원재(同源齋)

 

순천김씨는 고려 말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여수(麗水) 출신으로

조선조에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가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으로

개봉된 양경공(襄景公) 김승주(金承霔)의 증조부인 김윤인(金允仁)을

1세조로 하는 계통과,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의 조부인

김태영(金台泳)을 1세조로 하는크게 두 파가 있다.

 

동원재 마루

 

순천김씨는 조선 단종 때 계유정난으로 충익공 김종서(金宗瑞)가 화를

입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여 선대의 문헌이 거의 소실되었다.

김종서는 시조 김총의 22대손, 장증손 김단의 18대손이며, 김승주는

김총의 22대손, 김단의 아우 김심의 18대손으로 계대(系代)를 이어오고 있다.

 

평양군영당(平陽君影堂)

 

이곳은 순천지역의 "성황신"이기도한 평양군 김총의 초상화를

봉안하고 있는데, 문이 잠겨있어 직접 볼 수는 없었으나 자료에 의하면

초상화의 크기는 57.8 x 102.8cm이며,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7호이다.

 

순천김씨 시조 평양군 김총 초상화(자료)

 

주요 인물로는 고려 회종 때 추밀원원사를 역임한 김평(金平),

고려 말엽 자헌대부 호조전서 김을재(金乙財), 고려말과 조선조의

무신이며 좌의정을 지낸 양경공 김승주(金承霔), 조선 단종조의

충신이며 이조판서를 역임한 묵재공 김종한(金宗漢)이 있다.

 

평양군영당 안쪽에서 보는 내삼문(신문)

 

그리고 좌의정을 지낸 충익공 절재 김종서(忠翼公 節齋 金宗瑞), 

장의공 외암 김여물(壯毅公 畏菴 金汝岉),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북저 김류(文忠公 北渚 金瑬)등 13봉군(封君)과

6상신(相臣) 정승(政丞)을 배출하였다.

 

가락당기념관(嘉樂堂記念館)

 

근현대인물로는 극작가, 언론인으로 영남일보 사장을 역임한

소암(蘇巖) 김영보(金泳俌, 38세손), 제4.7.8.9.10.12대 6선 국회의원

김종철(金鍾哲,39세손), 한화 창업주 김종희(金鍾喜,김종철의 동생),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金升淵,김종희의 아들, 40세손),

제18대 국회의원,빙그레 회장 김호연(金昊淵,김승연의 동생, 40세손),

제22대 국회의원 김대식(金大植) 등이 있다.

 

편액 : 동원재(同源齋), 평양군영당(平陽君影堂), 가락당기념관(嘉樂堂記念館)

 

우리나라 성씨 중 김씨는 1,070만 여명으로 전체인구의 21.5% 이며,

김씨의 본관은 300여 본이 넘는데 그중 1위는 김해김씨로 412만 여명,

2위는 경주김씨 173만여명, 3위는 광산김씨 83만여명, 4위는 김녕김씨,

5위는 (구)안동김씨, 의성김씨 순이며, 순천김씨는 6만 3천여명이다.

 

순천김씨 시조 사적지 연혁비(順天金氏 始祖 史蹟地 沿革碑)와 김승연(金升淵) 공적비

 

김종서는 단종 1년 아들 김승규(金承珪)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철퇴를 맞고 비명에 갔는데, 이때부터 순천김씨의 수난은 계속된다.

김종서의 아들과 손자들도 이때 대부분 죽임을 당하는데,
다행히 김승규의 셋째 아들은 노비에 업혀 무주의 친척집에서

자랐다고 하며, 그 뒤 전북 부안의 위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대를 이었다.

 

시조 김총 묘소 가는길

 

김종서의 또 다른 손자인 김팽도 역시 노비에 업혀 위도로 가서 살다가

장성하여 익산 내산동으로 이거하여 이때부터 자손들이 익산에 자리 잡았다

김종서는 계유정난 후 293년이 지난 영조 22년에 복권되었다.

 

순천김씨 시조 김총의 묘역

 

김종서(金宗瑞,1390~1453)의 본관은 순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지략이 뛰어나고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으며,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 상서원 직장(直長), 행대감찰(行臺監察)을

거쳐, 1419년(세종 1)에 사간원우정언이 되었다.

 

김총의 묘와 묘비, 장명등 

 

김종서는 조선 세종 때 6진을 개척했으며, 북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무찌르고 국토확장에 큰 공을 세웠으며, 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의

편찬작업을 책임지는 등 학자와 관료로서의 능력도 갖췄다.

1451년(문종 1) 10월 우의정으로 승진, 같은 해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계유정난으로 그의 이름은 모두 삭제되었다.

 

김총의 묘

 

여진족을 호령하던 기개가 넘치는 김종서의 우국충정의 시조 한수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 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순천김씨 시조 평양군 김총지묘(順天金氏 始祖 平陽君 金摠之墓)

 

측면(1)

 

측면(2)

 

무인석과 망주석(좌.우)

 

뒤쪽에서 안산을 보며

 

묘소 뒷편의 산신제단

 

시조 김총 묘소 아래에 있는 순천김씨 2세(二世) ~ 21세(二十一世)추모비와 제단(祭壇)

 

추모비 측면

 

추모비에서 보는 재실(동원재) 전경

 

순천 주암면 묘역입구의 "순천김씨 시조 사적지"(전남문화재 제27호)

 

(위 왼쪽) 성황신 김총영정(동판) ~전략. 성황신은 마을 수호신으로 신앙의 대상이다.

순천김씨의 시조인 김총 역시 순천의 고을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영정은 깁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두손에는 창을들고

검은색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 이하생략

(위 오른쪽) 시조 사적지 정화사업 기념비

(아래 왼쪽) 연못,  (아래 오른쪽) 묘역입구 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