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順興安氏)는 영주 순흥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高麗)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을 역임한
안자미(安子美)이고, 중시조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지내고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회헌 안향(安珦)선생이다.
파조는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이다.
순흥안씨 시조 재실 추원재(追遠齋)
순흥면은 영주 소백산 기슭의 현재 소수서원이 있는 일원으로,
지명은 조선 초기 설치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에서 유래되었다.
시조(始祖)인 안자미(安子美)는 고려 신종(神宗 재위: 1197~1204) 때
사람으로 사후에는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는데,
순흥현(順興縣) 토착 가문으로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순흥안씨 시조 세사단(歲祀檀) 단소(檀所)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각각 1파, 2파, 3파로 이어졌으며,
1파 후손에 14개파, 2파 후손에 4개파, 3파 후손에 4개파의 지파가 있다.
증손자 안향(安珦)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크게 현달하여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렀으며, 사후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세사단비
고려 흥위위보승별장 추봉 신호위상호군 순흥안공 휘 자미 세사단
군부인 세사단
(高麗 興威衛保勝別將 追封 神虎衛上護軍 順興安公 諱 子美 歲祀檀)
(君夫人 歲祀檀)
순흥안씨 시조(뒷편) 이하 묘소가 실전된 11위(位)의 세사단(歲祀壇)
순흥안씨의 주요인물로 고려와 조선에서는 안향(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안축(고려조의 문신, 관동별곡, 죽계별곡), 안경공(고려말 문신, 조선 개국공신),
안당(조선 중기 문신, 좌의정), 안위(명랑해전 공신) 등이며,
순흥안씨 세사단에서 보는 순흥 앞들
근현대에는 안창호(독립운동가), 안재홍(독립운동가), 안중근(독립운동가),
안춘생(독립운동가,초대 육사교장), 안익태(애국가 작곡가),
안응모(전 내무부장관), 안찬희(13.14대 국회의원), 안상수(전 인천광역시장),
안철수(전 국민의당 공동대표, 22대 국회의원), 안경덕(전 고용노동부장관),
안희정(전 충남도지사), 안준태(전 부산광역시장),안성기(배우),
안재환(배우), 안정환(축구선수) 등이며, 인구는 전국에 52만 여명이다.
순흥안씨 추원단비(順興安氏 追遠壇碑) ~ 단소 입구
순흥안씨(順興安氏) 추원단비(追遠壇碑)에는 시조이하 7대에 이르는
사적과 관향지 종사(宗事) 연혁, 종사에 힘쓴 선조들의 기적(紀蹟),
시조 사단을 이전하여 중건한 사실들이 기록되어있다.
순흥안씨 단소앞의 안(安)자를 형상화한 상징물과
가훈 표지석, 단소연혁, 헌성비 등
문의공 질재 안문개(文懿公 質齋 安文凱先生) 여항비(閭巷碑), 송덕비 등
안향(安珦,1243~1306)의 본관은 순흥(順興=흥녕,興寧 ). 초명은 유(裕).
이름은 향(珦),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이다.
향(珦)자가 조선 5대 문종과 같아서 후세에 초명인 유(裕)로 불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소수서원(紹修書院)
안향(安珦)은 고려시대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국 18현의
한 사람이자 한반도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이다.
안향은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주자(朱子)가 집대성한
도학인 주자서(朱子書)를 베껴(도입)와 섬학전(贍學錢)을 설치
하는 등 유학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를 등장하게 만들었다.
소수서원 영귀봉
신진사대부의 정계 등장은 질서가 무너져가던 고려를 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주요 동력이 되었으며 성리학의 이념을 중심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자 도학(성리학)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문묘에 제향되었다.
안향은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일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소수서원 문성공묘 정문
문성공 안향은 1243년(고종 30년) 흥주(현 순흥면) 배천리에서 태어나,
1260년(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한 후, 1272년 감찰어사(監察御史),
1289년 11월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부부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서
주자의 저작들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1290년 고려로 돌아왔으며,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랐다.
문성공묘(文成公廟 = 사당) ~ 국가유산 보물 제1402호
1296년(충렬왕 22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 원행을 다녀왔으며, 1298년 8월 세번째로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는데 이는 생애 마지막 국외 활동이 된다.
1300년 수국사(修國史)에 이어 광정대부 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최고 관위인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관세대와 문성공묘 측면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 강남(江南, 현 난징)에
보내 공자와 72현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 악기(樂器)
및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史書), 주자의 저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1304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고 대성전(大成殿)이 처음 완성되었다.
이 해에 수상관직인 판밀직사사 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으며, 2년이 지난 1306년 64세에 개경 자택에서 사망했다.
소수서원 영정각
안향이 세상을 떠난지 12년이 되는 1318년(충숙왕 5년)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원나라 화공을 불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했으며,
다음 해인 1319년(충숙왕 6년) 문묘에 안향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문묘에 안향의 신위는 제향신위로 자리매김 하였다.
문성공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1962.12.20 지정)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37cm, 가로 29cm로 소수서원 소장.
이 영정은 화면의 위쪽에 있는 안향의 아들인 우기가 쓴 제찬을 통해
1318년 왕이 원나라 화공을 불러 제작하였다는 배경을 알 수 있다.
소수서원(백운동) 강당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년) 안향의 생가가 있던 순흥면 내죽리에 그의 사당을 세우고,
학사를 옮겼는데, 이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1549년(명종 4년)에는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퇴계 이황(李滉)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명종의 친필로 쓰여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는데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우리나라 도학의 계보
안향 ~ 이진, 신천, 백이정, 권부, 우탁, 이조년 ~ 이재현 ~ 이곡 ~ 이색
~ 정몽주, 정도전, 권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 이언적, 서경덕, 조광조, 김안국 ~ 조식, 이황, 이이, 성혼
~ 박성임, 황준량, 조목, 류성룡, 김성일, 정구, 기대승 등으로 이어졌다.
'문화유산산책 > 한국 성씨의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齋)와 재실(齋室)과 재사(齋舍) (0) | 2024.12.27 |
---|---|
영양남씨의 뿌리 시조 남민(南敏) (0) | 2024.12.03 |
청주한씨 시조 한란(韓蘭)의 묘 (2) | 2024.10.11 |
풍산류씨 금계재사(金溪齋舍) (0) | 2024.09.23 |
(구)안동김씨 중시조 김방경의 음수재(飮水齋) (0) | 2024.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