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서설(孟子序說)
주희(朱熹)의『맹자서설(孟子序說)』
사기열전에 이르기를
"맹가는 추나라 사람으로, 자사의 문인 밑에서 공부했다. 도에 통달하고 나서 제나라로 가서 선왕을 섬겼으나,
선왕이 그를 등용하지 못해서 양나라로 갔다. 양혜왕이 맹자를 등용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사리에 멀고 세상 실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하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하고, 제나라는 손자와 전기를 등용하여 온 천하가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힘쓰고 있었고 공격과 정벌하는 것을 잘하는 일로 여겼었는데, 맹가는 이와는 달리 당우(요·순)와 3 대(하·은·주)의 높은 덕을 역설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제후들과 맞지 않았다. 맹자는 물러나 만장 등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시경과 서경의 뜻을 풀이하고 공자의 뜻을 펴서 맹자 일곱 편을 지었다."
한자(당나라 시대의 한유-한퇴지)가 말하기를
"요임금은 인의의 도를 순임금에게 전했고, 순임금은 우임금에게 전했고, 우임금은 탕왕에게 전했고, 탕왕은
문왕과 무왕과 주공에게 전했고, 문왕과 무왕과 주공은 공자에게 전했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했다. 가가 죽은 후에 이것은 전해지지 못했다. 순황(순자 - 전국시대 말기의 유학자, 성악설)과 양웅(전한의 유학자 '법언'의 저자) 등이 인의의 도를 택했으나 정밀하지 못했고, 이것을 말했으나 상세하지 못했다." 또 이르기를
"맹씨는 순수한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다. 순황과 양웅은 크게는 순수하나 작은 흠이 있다." (맹자의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 양웅은 사람의 본성은 선과 악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 또 이르기를 "공자의 도는 크면서도 몹시
넓어서 문하의 제자들은 그것을 두루 살펴 다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자에게서 배웠으나 다들 자기가 타고난 성품에 가까운 것을 터득하였던 것이다. 그 후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후들의 나라에 갈라져 살면서
또 각각 자기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쳐주게 되어, 근원은 멀어지고 말단은 더욱 갈라지게 되었다. 오직 맹가만은 자사를 스승 삼았는데, 자사의 학문은 증자한테서 나왔다. 공자께서 돌아가신 후 오직 맹자가
전하는 학문만이 공자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살펴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맹자로
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또 이르기를 "양자운(양웅)은 '옛날 양주와 묵적이 바른 길을 막자 맹자가 그들을
물리치고 길을 열어 활짝 열어 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묵의 학설이 널리 행하여져 정도가 없어지면,
맹자가 비록 현성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자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그의 빈 말을 실제로 적용하여 쓸 길이 없었을 것이니, 그 말이 비록 절실하였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었겠으랴. 그러나 그의 말 덕분으로
지금 배우는 이들이 아직까지도 공자의 도를 으뜸으로 받들고, 인의를 숭상하고 왕도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를
천하게 여기게 되었을 뿐이다. 그 대경대법이 모두 없어져버리되 구하지 못했고, 다 파괴되었으되 거두지 못해
이른바 100 ~1000 가운데서 1/10 밖에 남지 못한 형편이니, 맹자가 어찌 바른 길을 활짝 터놓을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만약에 맹자가 없었다면 다들 왼쪽으로 여미는 옷을 입고 오랑캐의 말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맹자를 높이 받들고 그 공로가 우임금의 공로에 못지않다고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자에게 물어 이르기를 "맹자도 聖人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정자가 이르기를 "감히 그가 聖人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이미 지극한 곳에까지 도달했다"
정자는 또 "맹자가 성인의 道에 끼친 공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공자는 仁字 하나만을 말했는데,
맹자는 입만 열었다 하면 곧 仁義를 말했다. 중니는 志 하나만을 말했는데, 맹자는 허다하게 養氣에 관하여
말을 했다. 이 두 자(즉 義와 氣)만으로도 그의 공로가 매우 큰 것이다."
또 "맹자가 세상에 큰 공로가 있는 것은 그가 性이 善하다는 것을 말했다는 점이다."
또 "맹자의 性善說과 養氣論에 관한 이론은 그 이전의 聖人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또 "학문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가 처해 있는 시대를 잘 알아야 한다. 만약에 시대를 알 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학문을 말할 자격이 없다. 顔子(안회 - 공자의 수제자)가 누추한 골목거리에서도 스스로 즐겁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공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자의 시대로 말하면, 세상에 이미 성인이 없었으니 어찌 맹자가 세상에 정도를 펴는 일을 자임하고 나서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맹자는 얼마만큼의 영기(英氣 - 뽐내는 기질)가 있었다. 그 바탕에 영기가 있으면 규각(圭角 - 모가 남, 기질)이 생기게 마련이고, 영기는 일을 심하게 해친다. 안자 같은 사람의 화순하고 온후함과 같지 않았다.
안자는 성인과의 거리가 단지 머리카락 한 오라기 사이였다. 맹자는 위대한 현자로서 아성(亞聖 - 성인의 다음가는 사람, 안자를 가리킴)의 다음가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맹자의 영기(英氣)는 어느 곳에 나타나 있습니까?'하는데 다만 공자의 말씀을 가지고 비교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대저 얼음이나 수정 같은 것도 빛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것들을 옥과 비교해 보면,
옥은 온화하고 윤택하고 함축 있는 기상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은 이런 많은 광채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양씨가 이르기를 "맹자 한 책은 다만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게 하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며, 놓인 마음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인의예지를 논함에 있어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을 발단으로 삼았고 사설의 해악을 논함에 있어 '그(즉 임금) 마음에 생겨나면 그 정치를 해친다.' 라고 했으며,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논함에 있어 '임금 마음의 그릇된 것을 바로 잡아 한번 임금을 바로잡으면 나라가
안정된다.' 고 했다. 온갖 천변만화가 다만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자기 자신을 바로잡는다면
무슨 일이고 다 넉넉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도 그 근본은 다만 마음을
바로 잡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마음이 그 올바름을 얻은 연후에 본성의 선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맹자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무릇 성선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구양영숙은 도리어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사람의 본성을 먼저 앞세우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라 하겠다. 사람의 본성 위에는 한 가지도 덧붙여서는 안된다.
요순이 만대에 걸친 법도가 된 까닭 역시 본성에 따른 것일 따름이다. 이른바 본성에 따른다는 것은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 그것이다. (인간의 본성) 밖에서 계획을 세우고 술법을 써서 공업을 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인간의 욕심의 사사로움일 뿐으로 성현이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사이 같은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孟子序說
史記列傳曰: 孟軻, 趙氏曰: 孟子, 魯公族孟孫之後. 漢書注云: 字子車. 一說: 字子輿. 騶人也, 騶亦作鄒, 本주國也. 受業子思之門人. 子思, 孔子之孫, 名伋. 索隱云: 王소以人爲衍字. 而趙氏注及孔叢子等書亦皆云: 孟子親受業於子思. 未知是否? 道旣通, 趙氏曰: 孟子通五經, 尤長於詩書. 程子曰: 孟子曰: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孔子聖之時者也. 故知易者莫如孟子. 又曰: 王者之迹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 又曰: 春秋無義戰. 又曰: 春秋天子之事 , 故知春秋者莫如孟子. 尹氏曰: 以此而言, 則趙氏謂孟子長於詩書而已, 豈知孟子者哉? 游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按史記: 梁惠王之三十五年乙酉, 孟子始至梁. 其後二十三年, 當齊민王之十年丁未, 齊人伐燕, 而孟子在齊. 故古史謂 孟子先事齊宣王後乃見梁惠王·襄王·齊민王. 獨孟子以伐燕爲宣王時事, 與史記·荀子等書皆不合. 而通鑑以伐燕之歲, 爲宣王十九年, 則是孟子先游梁而後至齊見宣王矣. 然考異亦無他據, 又未知孰是也. 當是之時, 秦用商앙, 楚魏用吳起, 齊用孫子·田忌. 天下方務於合從連衡, 以攻伐爲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所如者不合. 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趙氏曰: 凡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韓子曰: 孟軻之書, 非軻自著. 軻旣沒, 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 愚按: 二說不同, 史記近是.
韓子曰: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不得其傳焉. 荀與揚也, 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 程子曰: 韓子此語, 非是蹈襲前人, 又非鑿空撰得出, 必有所見. 若無所見, 不知言所傳者何事.
又曰: 孟氏醇乎醇者也. 荀與揚, 大醇而小疵. 程子曰: 韓子論孟子甚善. 非見得孟子意, 亦道不到. 其論荀揚則非也. 荀子極偏駁, 只一句性惡, 大本已失. 揚子雖少過, 然亦不識性, 更說甚道.
又曰: 孔子之道大而能博, 門弟子不能편觀而盡識也, 故學焉而皆得其性之所近. 其後離散, 分處諸侯之國, 又各以其所能授弟子, 源遠而末益分. 惟孟軻師子思, 而子思之學出於曾子. 自孔子沒, 獨孟軻氏之傳得其宗. 故求觀聖人之道者, 必自孟子始. 程子曰: 孔子言參也魯. 然顔子沒後, 終得聖人之道者, 曾子也. 觀其啓手足時之言, 可以見矣. 所傳者子思·孟子, 皆其學也.
又曰: 揚子雲曰: 古者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 廓如也. 夫楊墨行, 正道廢. 孟子雖賢聖, 不得位. 空言無施, 雖切何補. 然賴其言, 而今之學者尙知宗孔氏, 崇仁義, 貴王賤覇而已. 其大經大法, 皆亡滅而不救, 壞爛而不收. 所謂存十一於千百, 安在其能廓如也? 然向無孟氏, 則皆服左임而言侏離矣. 故愈嘗推尊孟氏, 以爲功不在禹下者, 爲此也.
或問於程子曰: 孟子還可謂聖人否?
程子曰: 未敢便道他是聖人, 然學已到至處. 愚按: 至字, 恐當作聖字.
程子又曰: 孟子有功於聖門, 不可勝言. 仲尼只說一箇仁字, 孟子開口便說仁義. 仲尼只說一箇志, 孟子便說許多養氣出來. 只此二字, 其功甚多.
又曰: 孟子有大功於世, 以其言性善也.
又曰: 孟子性善 ·養氣之論, 皆前聖所未發.
又曰: 學者全要識時. 若不識時, 不足以言學. 顔子陋巷自樂, 以有孔子在焉. 若孟子之時, 世旣無人, 安可不以道自任.
又曰: 孟子有些英氣. 재有英氣, 便有圭角, 英氣甚害事. 如顔子便渾厚不同, 顔子去聖人只豪髮閒. 孟子大賢, 亞聖之次也.
或曰: 英氣見於甚處?
曰: 但以孔子之言比之, 便可見. 且如빙與水精非不光. 比之玉, 自是有溫潤含蓄氣象, 無許多光耀也.
楊氏曰: 孟子一書, 只是要正人心, 敎人存心養性, 收其放心. 至論仁·義·禮·智, 則以惻隱·善惡·辭讓·是非之心爲之端. 論邪說之害, 則曰: 生於其心, 害於其政. 論事君, 則曰: 格君心之非 , 一正君而國定 . 千變萬化, 只說從心上來. 人能正心, 則事無足爲者矣. 大學之脩身·齊家·治國·平天下, 其本只是正心·誠意而已. 心得其正, 然後知性之善. 故孟子遇人便道性善. 歐陽永叔却言 聖人之敎人, 性非所先 , 可謂誤矣. 人性上不可添一物, 堯舜所以爲萬世法, 亦是率性而已. 所謂率性, 循天理是也. 外邊用計用數, 假饒立得功業, 只是人欲之私. 與聖賢作處, 天地懸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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