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공 매계 조위선생의 사적비가 출생지인 김천 봉산면 인의리
봉계 초등학교입구에 세워져
2019년 10월 29일 오전 11시에 역사적인 제막식을 가졌다
제막식 안내문
사적비 바로 앞의 제막식 현장
내외 귀빈과 참석자들
국민의례에 이어
사회자(봉계대동회)
매계집 국역을 하였고 사적비문을 지은 공주대학교 이동재(李東宰) 교수에게 문장공대종회장이 감사패 전달
"문장공매계조위선생사적비"의 제문을 쓴 경남의 서예가 방손 조현판(曺鉉判)씨에게도 감사패 전달
사적비앞에서 사적비건립 경과보고를 하는 조홍 문장공대종회장
조홍 문장공 대종회장
조기현 건립추진위원장 인사(봉계대동회회장)
김충섭 김천시장 축사
김세운 김천시의회의장 축사
낙엽이 곱게 물들어가는 마을앞 계류
박판수 도의원 축사
경향각지에서 온 창녕조씨 종친 회장들과 종원들
김천시장과 내빈들
조주환(曺柱煥) 창년조씨 전국대종회장 축사
송언석 김천시 국회읜원 축전을 대독하는 김천시당 사무국장
문장공 매계 조위선생 사적비 제막
제막식 장면 동영상
내빈 기념촬영
종원들의 기념촬영
문장공매계조위선생사적비(文莊公梅溪曺偉先生事蹟碑)
ㅅ
사적비문(1)
先生의 諱는 偉이고 字는 太虛이며, 號는 梅溪, 諡號는 文莊이고, 본관은 昌寧이다.
선생은 1454년(端宗 2년) 金山郡 鳳溪里 堂洞(慶尙北道 金泉市 鳳山面 仁義里 769) 지금의 聿修齋에서
父親 蔚珍縣令 曺繼門과 母親 文化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시조는 신라 제26대 眞平王의 사위였던 曺繼龍이며, 先祖들은 대대로 경상도 昌寧지방에서 살다가
고려후기 上京從仕하면서 부터 族勢가 크게 확장되고 鮮初에 이르러서 名門巨族이 되었다.
고려 말 선생의 高祖父인 曺遇禧는 貞順大夫 判典儀寺事를 역임하고 左侍中으로 贈職되어 昌城府院君에 封해졌고,
曺敏修는 紅巾賊과 倭寇를 크게 물리쳐서 門下侍中에 올라 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曾祖父인 曺敬修는 曺敏修의 동생으로
密直司副使와 上護軍을 역임하였고 端誠佐命功臣에 冊錄되어 端誠君에 封해지고 左贊成에 追贈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선생의 당숙인 曺錫文은 謁聖文科에 급제하고, 李施愛의 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敵愾功臣 1등에 冊錄이 되고 左議政을 거쳐
領議政에 올랐다. 祖父인 曺深은 昌寧曺氏 金泉入鄕祖로 散員에 蔭補되었고, 선생이 嘉善大夫 戶曹參判에 오르자
通政大夫 兵曹參議로 追贈되었으며, 아버지 曺繼門은 玄風과 蔚珍의 縣令을 역임하였고 吏曹參判에 追贈되었다.
선생의 妹兄은 佔畢齋 金宗直이고, 庶兄으로 曺倫과 曺佺, 庶弟로 孝康公 適庵 曺伸이 있는데, 선생과 曺佺,曺伸 등
3형제가 모두 문장이 뛰어나 曺門三文章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선생은 初娶로 거창 현감 申允範의 딸을 맞이하였고,
後娶로 平壤 金氏를 맞이하였으나 장성한 자식이 없어서, 선생의 死後에 從弟인 郡守 倜의 둘째 아들 士虞를 後嗣로 삼았다.
선생은 타고난 資品이 탁월하여 이미 일곱 살에 시를 지어 주위에서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대가 컸으며, 어린 시절부터
金宗直에게 학문을 사사받았고, 당숙인 忠簡公 曺錫文에게서 小學을 親授받고 學問하는 方法과 經世의 道를 배웠으며,
18세(1471년, 成宗 2년)에 初試인 司馬試에 壯元으로 합격하고 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을 연마하며 科業을 익혔다.
선생은 21세(1474년, 成宗 5년)에 文科에 급제하여 承文院 正字를 除授받았으며, 1476년(成宗 7년) 藝文館 奉敎로 재직할 때,
王命으로 許琛, 兪好仁 등과 龍山의 藏義寺에서 賜暇讀書를 하였다. 선생은 1479년(成宗 10년) 弘文館 副修撰으로 재직할 때,
여러 대신들이 선생이 年少하고 경험이 부족하여 일을 그르칠까 염려된다는 諫言에도 불구하고 永安道 敬差官으로 任命되어
三峯島의 亂民을 招諭하였고, 日本에 가는 通信使 李亨元의 書狀官으로 渡日하여 文名을 떨쳤으며,
1481년(成宗 12년) 弘文館 修撰으로서 詩聖인 杜甫의 詩를 국문으로 번역하는 杜詩諺解 사업에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1484년(成宗 15년) 연로하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乞郡하자, 成宗은 “너는 문장으로 나라에 身命을 바치고
사적비문(2)
궁중에서 나를 모셨으니 내가 國器로 삼은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어버이가 늙은 것 때문에 사직하고 侍養하기를 원하여
가까운 군의 守令을 除授하여 어버이 奉養을 돕도록 하였다.”라고 하며 咸陽郡守로 임명하자, 이곳에 부임하여 孝友의 이치로
다스려서 善政을 베풀었다는 칭송을 들었으며, 1489년(成宗 20년) 부친상을 당하자 成宗은 祭米 등을 賻儀로 下賜하였다.
선생은 1491년(成宗 22년) 喪을 마치고 상경하여 承政院 同副承旨를 거쳐, 1492년(成宗 23년) 承政院 都承旨.
1493년(成宗 24년) 嘉善大夫 戶曹參判에 올랐다. 선생은 1494년(成宗 25년) 외직인 忠淸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495년(燕山君 1년) 내직으로 돌아와 成均館大司成에 올랐으며, 다시 외직인 全羅道觀察使로 부임하였으나,
얼마 후 母親喪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 동안 廬墓를 살았다. 선생은 1498년(燕山君 4년) 同知中樞府事 經筵特進官이 되었고,
그해 4월 “百官 가운데 그 氣量이 廣大하고 文章과 道德이 제일이다”라고 하여 聖節使로 임명되어 明나라에 갔다가
8月 귀국길에 戊午士禍에 佔畢齋 문집을 纂集한 죄에 연루되어 평안북도 龍彎(義州)으로 流配되었다.
이후 1500년(燕山君 6년) 全羅南道 順天으로 移配되어 평안도 熙川에서 移配되어온 寒暄堂 金宏弼과 함께
서문밖 玉川가에 臨淸臺를 세우고 學問과 道學을 講論하며, 眞率會를 결성하여 이곳 선비들에게 學文을 전수하였다.
선생은 유배된 이후 燕山君의 貪虐無道한 暴政으로 나날이 어려워져 가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느라 發病하여,
50세(1503년, 燕山君 9년)에 유배지인 順天에서 逝世하였다. 이에 동생인 曺伸이 고향으로 運柩하여
慶尙北道 金泉市 代項面 福田里 馬巖山 先塋의 父親 幽宅 아래에 安葬하였고, 祭文은 평생의 동지인 金宏弼이 지었으며,
墓誌銘은 당대의 최고의 문장가인 虛白堂 洪貴達이 지었다. 선생은 寬厚한 인품과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우리나라 정치사와 사상사, 문학사에서 훌륭한 문인으로 평가받는 인물들과 주로 교유하였다.
金宗直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新進士類인 金宏弼, 鄭汝昌, 金馹孫, 表沿沫 등과 同志愛를 나누었고,
賜暇讀書를 함께한 관료인 權健, 許琛, 蔡壽, 兪好仁, 楊熙止 등과 道義之交를 맺었으며, 仕宦의 길에서 만난 관료인
徐居正, 姜希孟, 尹必商, 金孟性, 洪貴達, 成俔, 申從濩 등과 心交를 나누었고, 鄭希良과는 의주 유배지에서
스승과 제자의 緣을 맺고 시문을 지으며 유배에 따른 좌절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선생은 1477년(成宗 8년) 王命으로 교육의 진흥과 인재 양성을 강조한 讀書堂記를 지었고, 1478년(成宗 9년) 蔡壽, 許琛, 成俔 등과 함께 松都(開城)를 유람하며 지은 공동 詩文集인 遊松都錄을 編輯하였으며, 1481년(成宗 12년) 王命으로 詩聖인 杜甫의 詩를
한글로 번역한 杜詩諺解를 완성하고 詩學의 목적과 중요성을 강조한 序文을 지었고, 1484년(成宗 15년) 咸陽郡守 재직 시
牧民官의 자세와 處身을 강조한 金山東軒重修記를 지었으며, 1491년(成宗 22년)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印刊史를 알 수 있는
海印寺重創記를 지었다. 또한 선생은 1493년(成宗 24년) 王命으로 金宗直의 문집인 佔畢齋文集을 纂輯하였고,
1498년(燕山君 4년) 金宗直이 지은 彛尊錄의 序文을 지어 崇祖敦宗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1500년(燕山君 5년) 유배지 龍彎에서 一片丹心 衷情을 드러낸 葵亭記를 지었으며, 1501년(燕山君 7년) 移配地 순천에서 국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가사인 萬憤歌를 지었으며, 학문과 講學의 여가에 文人들의 詩評과 逸話 등을 소개한 梅溪叢話를 지었다.
선생은 文人으로서 學文과 經世에 관한 글과 많은 詩文을 저술하였으나, 甲子士禍 때 죄가 추가되어 剖棺斬屍를 당하고
家産이 籍沒되어 지은 시문이 모두 散失되었다. 후에 동생인 曺伸이 일부를 수집하여 撰次하였고,
이를 집안에서 보관하여 오다가 선생이 伸冤된 뒤, 1718년(戊戌年,肅宗44년) 金山郡守였던 金楙의 주선으로
本文 4권과 年譜와 遺事를 부록으로 하여 5권2책으로 木版本 梅溪集이 간행되었으며,
1928년(戊辰年) 戊戌本을 底本으로 하고 經筵日記와 士禍實錄, 諸家의 評說을 증보하여 10권5책으로 石板本 梅溪集이 重刊되었다. 또한 梅溪集의 초간본인 戊戌本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韓國文集叢刊 16에 標點하여 影印되었고,
2009년 李東宰가 國譯하여 평사리출판사에서 간행하였으며, 戊辰本은 洪順錫의 주관으로 계명문화사에서
사적비문(3)
영인하였다. 선생의 학문적 성취, 애국애민 정신과 孝友의 실천에 대한 諸人의 평가가 전한다.
먼저, 스승인 金宗直은 “내가 太虛와 더불어 講論하면 마치 큰 강물이 도도히 흘러 막힘이 없으니 太虛야 말로
참으로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여 先生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고, 동문인 金宏弼은 “先生의 재주와 생각은 일찍이
꽃봉오리처럼 날아오르고 그 명성은 온 나라 안에 진동했다. 文章은 나라를 빛냈고 그의 詩는 천하제일이다”라고 하여
선생의 학문과 공적을 극찬하였으며, 후학인 尤菴 宋時烈은 “梅溪 曺先生은 탁월한 재주와 寬厚한 資質을 타고나서
佔畢齋를 師事하고 戮尼에서 金宏弼과 學問을 講論했으며, 문장으로 왕조를 빛냈고, 또 經術을 닦아 虁와 皐陶가 되기를
기약했네”라고 하여 선생의 인격과 학문을 극찬하였다. 선생은 中宗反正 직후인 1507년(中宗 2년) 伸寃되어 嘉靖大夫 吏曹參判으로 追贈되었고, 1709년(肅宗 35년) 順天 유생들의 上疏로 資憲大夫 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 五衛都摠府都摠管 太常議로 加增되고 文莊이라는 시호를 下賜받았다.
선생은 1564년(明宗 19년) 順天의 玉川書院에 寒暄堂 金宏弼과 함께 配享되었고,
1648년(仁祖 26년) 金山 景濂書院에 佔畢齋 金宗直 등과 함께 配享되었으며, 1725년(英祖 1년) 忠北 永同郡 黃澗의 松溪書院에
主壁으로 配享되었다. 또한 후손들이 선생의 遺墟地에 聿修齋를 건립하여, 선생의 精神을 계승하고 있으며,
율수재는 2008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1호로 지정되었고, 이곳에서 1980年부터 김천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梅溪白日場’을
개최하여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고 있다. 이는 선생의 부모님에 대한 孝誠이 임금에 대한 一片丹心의 衷情으로 심화되었고,
兄弟友愛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확대되어 愛國愛民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아아! 선생이 남긴 孝悌忠信의 정신과 애국애민의 실천, 높은 학문은 후세에 龜鑑이 되어 영원히 기억되고 빛나리라,
2019年 10月 29日
韓國漢字漢文敎育學會長 李東宰 撰. 傍孫 한메 曺鉉判 書
鳳溪大同會住民一同, 昌寧曺氏文莊公派大宗會 謹竪
建立推進委員會 顧問 秉均 秉相 瑀煥 圭象 相道 委員長 傍孫 基鉉
委員 昇模 智煥 秉律 成默 德默 珏煥 圭鵬 圭三 舜㠍 順泰
碑文 資料提供 및 監役 15代孫 事務官 靑谷 智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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