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표류기는 교리 최부(崔溥)가 1487년, 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이듬해 초에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곧 고향으로 급히 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다.
이에 43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는 등 곤욕을 치르고
결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台州府 臨海縣)에 도착하였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이용,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그는 상신(喪身,상을 당한 몸)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가의 예와 윤리의 원칙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기술했는데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이다.
그리고 곧 고향으로 달려가 여막을 지키다가 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삼년상을 지냈다. 그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 여러 가지 판본과
사본이 통용되고 있었으며, 일본어 번역본까지 나왔는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1769년(영조 45)에 간행되었다.
소문쇄록에서 보는 최부(崔溥)의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성화(成化) 정미년(성종 18년,1487년) 겨울에 교리 최부(崔溥)가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제주(濟州)에 갔다가,
이듬해 정월 아버지의 상사를 듣고 윤월 초3일에 배를 출발시켰는데,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뱃사람 43명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기만
기다리다가, 11일에야 한 섬에 닿아 비로소 물을 얻어 마셨다.
13일에는 중국 영파부(寧波府) 근처의 산에서 도적을 만나
가진 금품을 모두 빼앗기고, 도적이 닻과 노를 꺾어버린 다음
배를 끌고 가 바다 한가운데 내버리고 달아났다.
또 동서로 표류하다가 16일에 태주(台州) 임해현(臨海縣) 근처의
우두(牛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에서
또 어선들에게 포위되어 왜적(倭賊)이라는 지목을 받았다.
17일, 비를 무릅쓰고 겨우 피하여 촌집에 투숙, 출투(出投), 출몰(出沒)이라고도
한다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서로 번갈아 끌고 다니면서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18일에 포봉리(浦蓬里)에 이르렀는데,
수당두채(守塘頭寨) 천호(千戶) 허청(許淸)이 불러서 심문하더니 끌고 갔다.
피로에 지쳐 다리는 절룩거리며 천신만고 끝에 도저소(桃渚所)에 이르렀다.
21일에는 송문(松門)의 비왜지휘(備倭指揮) 유택(劉澤)이 와서 취조하고,
천호 적용(翟勇)을 시켜 호송하였다.
2월 초4일에 소흥부(紹興府)에 도착하니,
비왜서(備倭署) 도지휘(都指揮) 및 포정사관(布政司官) 등이
최부에게 본국의 일을 캐어 물어보고, 왜인이 아님을 가려내었다.
초6일에 항주(沆州)에 이르니,
지휘(指揮) 양왕(楊旺)을 보내어 기행(起行)으로 압송하였다.
가흥(嘉興)ㆍ소주(蘇州)ㆍ상주(常州)ㆍ양자강(揚子江)ㆍ양주(楊州)ㆍ
고우주(高郵州)ㆍ회안부(淮安府)ㆍ질주(郅州)ㆍ서주(徐州)ㆍ
패현(沛縣)ㆍ제령주(濟寧州)ㆍ동창부(東昌府)ㆍ덕주(德州)ㆍ창주(滄州)ㆍ
정해현(靜海縣)ㆍ천진(天津)ㆍ위곽현(衛漷縣)ㆍ장가만(張家灣)을 거쳐,
3월 28일에 북경(北京)에 이르렀다가
4월에 떠나 6월 4일에 본국으로 돌아와,
14일 청파역(靑坡驛 서울 청파동 근처)에 도착해서,
임금의 명에 의하여 표류 일기를 써 가지고 들어왔다.
* 최부(崔溥,1454~1504)는 조선전기의 추쇄경차관,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申從濩)와 더불어 문명을 떨쳤고, 김굉필(金宏弼) 등 동학들과
정분을 두터이 하였으며,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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