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을 빛낸 역사 인물 <제25편> 창녕조씨 조유(曺逾)부자
2021년 02월 25일 [김천신문]
-지극한 효행과 우애로 한때 조효자동(曺孝子洞)으로도 불려
아들 조세호, 조세룡, 조세봉, 조세붕 4형제 학문으로 명성-
봉계 창녕조씨 4효4학행(四孝四學行)으로 불리며 칭송 얻어
어버이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였고 집안을 다스림에는 엄정하고 자애로움으로…
자제들을 가르침에는 뜻을 세우고 힘쓰게 하였으며 효제를 근본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봉산면 인의리, 예지리, 신리는 예부터 봉계라 통칭하며 김천지방을 대표하는
명문사족(名門士族)이 뿌리를 내려 일찍이 현인달사(賢人達士)와
충신, 효자, 열녀를 배출하는 반촌(班村)으로 이름이 났다.
그 가운데서도 창녕조씨 문중에서 올곧은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점필재 김종직의
처남으로서 당대 제일가는 문장가로 명성을 떨친 매계 조위가 갑자사화때 참화를 당하여
문중이 크게 위축되었다가 훗날 다시한번 문중의 기개를 드높이게 되니
이것이 바로 우졸당(愚拙堂) 조유(曺逾)와 아들 4형제에 이르러서이다.
조유는 증 이조참판 조제창(曺悌昌)의 아들로 1649년(인조27년) 봉산면
인의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고(子高)이고, 호는 우졸당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뜻이 깊어 매사에 성실하였다고 한다.
어버이 섬기기를 지성으로 하였고 집안을 다스림에는 엄정하고 자애로움으로 하고
사람을 도(道)로서 부렸으며 자제들을 가르침에는 뜻을 세우고 힘쓰게 하였으며
효제를 근본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학문을 대함에 출세를 경계하며 학문에는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知)에 이르고
자신을 살펴서 그 실(實)을 실천하는데 노력했다.
또한 역리(易理)는 스스로 깨우쳐 작괘(作卦)하는 법을 연구하면서
“이것은 역리의 지류(枝流)일뿐이다.”고 하였다. 물욕이 없고 마음가짐이 확고하여
“스스로 속임이 없어야 한다.”는 말로 평생의 좌표로 삼았다.
그리고 일찍이 “내가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부모를 현양(顯揚)시켜드리지 못하였고
또 증자(曾子)의 부미(負米)하는 봉양이 없어 그 은혜를 조금도 보답하지 못한 채
부모를 여의었으니 이제 그만이다. 나의 심회가 어떠하겠는가.
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으로는 다만 한 아우가 있을 뿐인데 능히 한 집에서 함께
지내지 못하니 이는 다 나의 불효하고 불우한 소치이다”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1696년(숙종22년) 별세하자 영의증을 역임한 청사(淸沙) 김재로(金在魯)가
천거하여 지평으로 증직되었다. 대사헌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는 유고서(遺稿序)에서
“우졸당은 몸가짐이 고고하고 배운 바를 독실이 행함은 남이 미칠 바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1778년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추향되었다. 저서로 『우졸당집(愚拙堂集)』이 있다.
조유의 장남인 조세호(曺世虎)는 1674년(현종15년) 봉계에서 태어나
자(字)는 병여(炳汝)이고 호는 체췌당(棣萃堂)으로 시경의 하피농의(何彼穠矣)
당체지췌(唐棣之萃)에서 따온 것으로 위의(威儀)가 있고 예의가 밝다는 뜻이다.
효심이 지극하고 특히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일찍이 아버지 조유에게서 글을 배워 재사(才士)가 뛰어났으며
숙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참봉에 제수되고
제릉참봉(齊陵參奉), 자헌대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등을 역임했다.
조세룡(曺世龍)은 1676(숙종2년) 조유의 차남으로 봉계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태여(泰汝)이고 호는 인재(認齋)이다. 수암 권상하(權尙夏) 문하생으로
성리학에 매진하였고 예에 밝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상제(喪制)를 지키는데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슬퍼하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또한 학문과 덕행이 높았다. 사후에 관찰사가 효행으로 천거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이 증직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행장은 아우 조세붕이 짓고 묘갈명은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이 지었다.
조세봉(曺世鳳)은 1680년(숙종6년) 조유의 3남으로 봉계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명보(鳴甫)요 호는 삼석재(三惜齋)이다. 도학(道學) 성리학(性理學) 탐구를 위해
중용(中庸)을 3만번 읽는 등 학문이 높고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통덕랑을 지내고 1839년(헌종5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이 증직되었다.
조세붕(曺世鵬)은 조유의 4남으로 1691년(숙종17년) 봉계에서 태어나
자는 운거(雲擧), 호는 경지재(敬知齋)라 했다. 천성이 순후하고 도리를 알아
5세에 부친을 여의자 3년을 추복(追服)하고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성리학을 탐구하여 학문이 대성하고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34세인 1725년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참봉, 교관, 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효행으로 사복시정에 증직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우졸당 조유와 아들 4형제는 학문이 높고 효심이 지극하였는데 4형제가 한울타리
안에 살면서 형제간 우애가 지극하여 사림(士林)에서 추앙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우졸당과 아들 4형제가 거처하는 마을을 일컬어
“조효자동(曺孝子洞)”이라고 불렀으며 아들 4형제를
“창녕조씨(昌寧曺氏) 4효4학행(四孝四學行)이라 높이 칭송하였다.
<자료제공 김천문화원>
*참고로 참판공(參判公) 조제창(曺悌昌)은 환자의 11대조(규자의 12대조)되시며
술하에 장남인 우졸당(愚拙堂) 조유(曺逾)와 차남인 경매당 조술(曺述)을 두셨으며,
우졸당(愚拙堂) 조유(曺逾)는 4형제를 두셨는데
장남은 조세호(曺世虎)로 지사공(知事公), 차남은 조세룡(曺世龍)으로 인재공(認齋公),
삼남은 조세봉(曺世鳳)으로 삼석재(三惜齋), 사남은 조세붕(曺世鵬)으로 시직공(侍直公)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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