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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조문 인물과 발자취,묘소

우졸당 조유선생 유고집과 경매당 조술 묘소

by 안천 조각환 2021. 3. 12.

우졸당(愚拙堂) 조유(曺逾,1649~1696)선생의  유고(遺稿)집은

한자로 작성되어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것을

김천향토사연구회에서 국역본으로 발간하게 된것이다.

국역과 서문은 전 성주향교 전교(典校) 강희대(姜熙大)님이 수고하였으며,

문중의 조규붕(曺圭鵬)님이 발간문을, 조지환(曺智煥)님이 발문을 하였다.

상목 권지단(常目 卷之單) 원본의 우졸당선생 연보는 조세룡(曺世龍)선조가,

연보의 발문은 조박(曺박 雨+博) 선조가 쓰셨다.

 

우졸당유고집 표지

 

유고는 시(詩) 3편, 일기인 기자(記自) 4편, 서(書) 10편이고,

부록으로 만사(輓詞) 13편, 행장(行狀) 13편,

그외 소지(所志,백성이 도백이나 군수에게 올리는 청원서)가 

김산유생(金山儒生) 김선기등 100여인과 도내유생 진사 신진경등 200여인,

도내 선산유생 박익령등 80여인 등 3편이 있으며,

경렴서원 추배시의 기록, 경렴서원 변파록, 봉안문, 상량문등의 기록도 있다.

 

 

우졸당(愚拙堂) 조유(曺逾)선생은 송무 13대손으로 김천 입향조이신

조심(曺深)의 7대손이고, 매계 조위선생의 5대손이 되신다.

동생이 경매당(景梅堂) 술(述)이고, 아들은 4형제분으로

장남이 세호(世虎, 지사공), 차남이 세룡(世龍, 인재공),

삼남이 세봉(世鳳, 삼석재), 사남이 세붕(世鵬, 시직공)이다.

 

 

세계도(世系圖) 약보(略譜)

始祖 繼龍― ② 應神 ― ③ 壽享 ― ④ ― ⑤ ― ⑥ ― ⑦

― ⑧ 延祐 ― ⑨ 漢知 之賢 ― ⑪ 思詮 ― ⑫ 正鱗― ⑬ 仲龍 ― ⑭ 義文

― ⑮ 自奇 ― ⑯ 允恭 ― ⑰ ― ⑱ ― ⑲ 挻文 ― ⑳ (21) 松茂

更起 松茂― ② ― ③ 人取― ④ 元桂― ⑤ 遇禧 敬修(左贊成)

(參議公) ― ⑧ 繼文(蔚珍公)(文莊公) ― ⑩ 士虞(別堤公)

― ⑪ 胤禧(寧越公)(黙齊公) ― ⑬ 悌昌(參判公) ⑭ 유(逾, 愚拙堂)

                                                                                               술(述, 경매당)

⑮세호(世虎, 지사공), 세룡(世龍,인재공), 세봉(世鳳,삼석재), 세붕(世鵬,시직공)

 

우졸당 유고 국역본 서문(序文)

 

전략...예전 금릉에 우졸당(愚拙堂) 조선생(曺先生)은 인조 27년

기축(己丑,1649)년에 탄생하시어 숙종 병자(丙子,1696)년에

고종(考終)하시니, 매계(梅溪)선생의 5대손이다. 대저 선생의 일생은

가학을 전습(傳襲)하고, 더욱 중용, 대학이 침잠하여 5만번을 읽고

어떤 사람이 어려운것에 대하여 물으면 대나무 쪼개듯하여

경전의 주소(註疏)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 중략...

비록 상중에 있어도 궤전(饋奠)이나 조문하는 손님이 올때가 아니면

강독을 페하지 않았으며, 평소에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우졸(愚拙)로 자호하며 자임(自任)의 뜻을 밝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져 처음의 성품을 회복할 것이라" 하였다.

...중략...

경자(庚子,2020)년 봄 2월에 선생의 10대손 우졸당 종중회장 지환(智煥)씨가

유집을 갖고 나의 봉필(蓬筆)에 와서 이르기를 "김천 향토사연구회에서

시행하는 고문 번역사업의 일환으로 우리선조 우졸당(愚拙堂)선생

문집을 선정하였으니, 원컨대 인형(仁兄)은 번역하고 서문을 지어서

우리 후손들로 하여금 선생의 홍덕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수십 일 동안 번역하여 선생의 학문을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우리 사문(斯文)을 부지(扶持)하는 진서(眞書)라 하겠다.

...중략...

이렇게 사문이 쇠퇴해 가는 즈음을 당하여 사람마다 읽고

효제와 충신의 마음이 향당(鄕黨)과 주려(州閭)에서 흥기(興起)한다면

거의 풍화에 도움이 있기를 바라노라.

 

서기 2020년 경자(庚子) 중춘(仲春)에

전 성주향교 전교 진주 강희대 삼가 서문하다.

 

유고집 국역본 발간 인사말

 

우졸당선생 연보(간추림)

인조대왕 27년 기축(己丑,1649) 8월 임진(壬辰) 초5일

사시(巳時)에 공(公)이 김산 봉계리(鳳溪里)의 향제(鄕第)에서

태어나니, 곧 문장공(文莊公)의 구거(舊居)이다.

공이 8세인 병신(丙申)년에 할아버지 참의공(參議公)에게 수학하였다.

20세인 무신년에 소학(小學)을 300번 읽고 그쳤으며, 다음으로 대학을 읽음

공이 21세때인 기유(己酉)년에 상경을 무려 800번을 읽고

22세때는 서전(書典)하권을 무릇 1,000번을 읽음

공이 24세때인 임자(壬子)에 선산김씨에게 장가를 듬

 

37세때인 을축(乙丑)년에 어머니 송부인의 상사를 당함

44세때인 임신(壬申)년에 논어를 읽고,

45세에 주역의 계사편과 계몽편을 읽음.

46세때인 갑술(甲戌)년에 도백이 학행으로 별검(別檢)에 추천하였으나 받지못함

공이 48세때인 병자(丙子,1696)년에 병이 심해져

타인의 서책을 돌려 주었으며, 4월 11일 신시(申時)에 고종(考終)함

9월 11일에 방목(放牧, 외입석)의 선영(先塋) 묘좌원(卯坐原)에 장례를 행함.

 

우졸당 조유선생 묘소

 

연보의 발문(年譜跋文)

왕고(王考) 우졸당(愚拙堂) 연보는 나의 중부(仲父) 인재부군이

편집한 것이다. 섬실(纖悉)하고 상세하여 소자가 논의할 바가 아니라.

재종제 임이 한 책으로 베껴서 강목을 세워서 범례를 만들었으니

조금은 바꾸어 취사(取捨)하였다. 내가 지금 이것에 의지하여

베껴 주는데 한결같이 원본으로서 바르게 하려고 하니,

오히려 조금의 이동(異同)을 면하지 못하여 사이에 행장과 일기와

할머님에게 들은 말씀을 참고하여 두세 가지 조목을 보충하니,

비록 한 글자 한 구절이 각각 근거가 있어 실제를 기록하여

빠트림이 없이 갖추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참망한 허물을 또한 어찌

피하겠는가? 또 미루어서 기록한다는 것은 비록 기년(紀年)한 후의 일이나

고조 증조 양세의 증직을 갑자기 추서(追書)한 것은 모두 임금님의

은혜를 영화롭게 하여 후손들에게 보이려는 것이다.

 

불초손(不肖孫) 박(雨+博) 삼가 기록하다.

 

o 갑오(甲午, 1714년 숙종40) 간독 발문을 완성함.

한수선생(寒水先生) 권상하(權尙夏)가 지었다.

o 을묘(乙卯 1735, 영조11)년 지평에 증직됨.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도(道)에 안찰사가 되어 채방(採訪)하고

조정에 들어가 강연(講筵)에서 승전하여 증직하다.

o 을축(乙丑 1745 영조 21)년 묘갈명이 이루어짐.

-구암(久菴) 윤봉구(尹鳳九) 선생이 찬하다.

o 병자(丙子 1816 순조16)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됨.

-장자(長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세호(世虎)의 귀함으로

추은(推恩)하여 증직이 되었다.

 

*연보의 발문을 기록한 조 박은 우졸당 조유선생의 손자이시다.

 

행장을 쓰신 조유의 아우 경매당 조술(曺述)의 묘소

 

행장(行狀)

선생의 휘(諱)는 유(逾)이며, 자(字)는 자고(子高)이며, 성은 조(曺)씨이다.

창녕(昌寧)사람이다. ...중략....

장남 세호(世虎)의 아내는 평산신씨이니 통덕랑 명재의 따님이며,

3남 1녀를 두었다. ...차남 세룡(世龍)은 진사 안동 금선의 따님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니, ... 3남 세봉(世鳳)은 통덕랑 성산 이성로의 따님과

혼인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죽어 자녀를 기르지 못하고,

월성 이찬익의 따님에게 재취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니,...

4남 세붕(世鵬)은 통덕랑 성산 배세도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1남을 두어 어리다. ...장녀는 인천 채창징에게 시집가니

병자호란 때 척화신 채이항의 손자이다. 중씨와 계씨는 요사 하였다.

...중략...

가제(家弟) 술(述)이 감히 본초를 이어 그 아래의 문자를 채웠으나

감히 가깝다하여 넘치게 할 수 없고, 또 감히 사사로이 평생의 행적을

속일 수 없어 백가지에 하나도 기록하지 못하고,

평소에 친히 본 것과 향린(鄕隣)에서 함께 아는 것을 대략 서술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여 당세 군자의 일언(一言)을 구하여,

후래(後來)에 없어지지 않게 도모하려는 바이다.

 

아우 술(述)은 삼가 차서(次序) 쓰다.

 

유고잡 목차

 

 

우졸당 휘 유 묘갈명(遇拙堂 諱 逾 墓碣銘)

선사(先師) 한수재선생( 寒水齋先生)이 우졸당 조공(愚拙堂 曺公)의 간독(簡牘)뒤에 쓰기를 의 고고한 操行과 독실한 공부는 사람마다 미치기 어려운 바이다.” 하였으니, 자연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내가 고루하여 한 번도 여택(麗澤-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강론하고 수양을 힘쓰는 것)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니 유감스런 일이다. 내가 일찍이 선사(先師)이 글을 읽고 나서 공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대군자(大君子,여기는 한수재 선생을 이름)추중(推重)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였다가 이제 그 행장을 보니, 공은 진정 숨은 선비요 독실한 학문으로 남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은 분이다. 공(公)의 휘(諱)는 유(逾), 자(字)는 자고(子高)이다. 원조 휘 계룡(遠祖 諱 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부마(駙馬)로 창성군에 봉해져 창녕의 대성(大姓)을 이루었고, 몇 대를 지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평장사(平章事)8대나 배출 되었고, 휘 위(諱 偉)는 세칭 매계 선생인데 문학으로 성종의 지우(知遇)를 받았다가, 연산주(燕山主) 때 혹심한 사화(史禍)를 만났으니, 곧 공(公)5대조이다. 고조 휘 사우(高祖 諱 士虞)는 가문에서 겪은 화난(禍難)을 마음 아프게 여기어 여러 번 벼슬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증조 휘 윤희(曾祖 諱 胤禧)는 벼슬이 사정(寺正)에 이르고 조부 휘 익(祖父 諱 瀷)은 자호 묵재(自號 黙齋)로 병자호란 이후로는 집안에 들어앉아 뜻을 지켰고, 조모 신씨(祖母 申氏)는 대사성(大司成) 민일(敏一)의 따님이요, 우계(牛溪) 성(成)선생의 외증손(外曾孫)으로 어려서부터 특이한 행(行)이 있었으므로 우암(尤庵)선생(송시열)이 신씨(申氏)의 외조부 창랑(滄浪)공의 묘문(墓文)에 특서하였고, 부친 휘 제창(父親 揮 悌昌)은 일찍 작고하고 모친 송씨(宋氏)는 진(+)의 따님으로 인조 27(1649)에 금산(金山) 봉계리에서 공(公(을 낳았으니, 이곳은 곧 매계의 옛 집터이다. 공은 천성이 자상, 단아(端雅)하여 어려서부터 자연(自然) 도(道)에 가까웠고, 여러 아이들과 잡된 놀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4-5세 때에 화상을 입어 그 모양이 매우 흉측스럽게 생긴 아이를 만났는데 대뜸 고개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았다. 옆에서 그 까닭을 묻자, “저 아이가 반드시 부끄러워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보고 싶지 않다.” 고 대답하므로 듣는 이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공은 말을 배우면서부터 문자를 알았고 8세에 입학하여 능히 글의 대의(大義)를 통하였다. 15세에는 부친의 상을 만났는데 그 거리가 멀었으므로 밤을 불구하고 분상(奔喪)하여 어른과 다름없이 집상(執喪)하였다. 약관(弱冠)이 되어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 경(經), 사(史)와 송나라 현인들의 글을 모조리 강독하여 정밀히 추구(推究)하고 반드시 실천하기를 힘쓰되, 첫닭이 울면 일어나 맨 먼저 가묘(家廟)를 찾아 참배하고 이어 모친에게 인사를 드린 다음 글을 읽기 시작하여 밤이 깊어야 취침하였고, 배우기 전에는 배우기를 생각하고 배운 뒤에는 지키기를 생각해야 한다. 차라리 도(道)를 알고 나서 죽을지언정 배우지 못한 채 살지는 않겠다.”는 등의 자경문(自敬文)을 지어 책려하였다. 또한 일찍이 “대학(大學)의 수신(修身), 치국(治國)의 요법(要法)에는 모든 의리가 모두 갖춰져 있으니, 꿇어앉아 대학을 다시 읽기시작, 16년 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였는데, 그 회수는 일만여 번을 넘은지가 여러 차례였다. 이제야 나의 의지와 취향(趣向)이 각별해진 것을 알겠다. 이전에 읽었던 것은 참으로 신을 신은 채 가려운 곳을 긁은 격이었다.” 고 말하였으며, 누가 혹 의의(疑義)를 물으면 묻는 데로 명백히 답하여 듣는 자의 머리를 시원하게 하였다. 공(公)의 학문은 일신(一身)을 근본으로 삼아서 의용(儀容)은 반드시 공손하고, 언사는 반드시 자상하였으며, 의관(衣冠)은 반드시 단정히 하고, 기거(起居)는 반드시 조심히 하였으며, 마음가짐에는 담허(淡虛)하여 외부의 물욕에 집착되지 않고, 일 처리에는 공신(公愼)하여 사사로운 뜻이 게재되지 않았으며, 어버이 섬기는 데는 그 기색이 화기(和氣)스러웠고, 제사 받드는 데는 그 이 생시를 뵈듯 하였으며 집안은 엄격과 관용으로 다스리고, 사람은 정성과 진실로 대하였으며, 공부 과정에 있어서는 날마다 근면하여 잠시도 간단(間斷)이 없었다. 하루는 기력이 피로하여 늦게 일어나게 되자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기로 한 것이 내가 세운 뜻이건만, 한번 잠들었다가 깨었을 땐 날이 이미 밝았으니, 아는 겨울밤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나의 뜻이 서지 못해서인지하는 일기를 써서 스스로를 책려(策勵)하였으며 그 학문의 편모(片貌)를 엿볼 수 있다. 숙종 11(1689)에 모친의 상을 만나 삼일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3개월 동안 죽만 먹었고, 3년 동안 나물밥에 물을 마셨으며, 상복을 벗지 않은 채 밤낮으로 빈소를 지켰고, 침실에 들지 않았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거르지 않고 반드시 묘를 찾아가 죽기로써 애통해 하였으니, 옛날 소연(少連)과 대연(大連) 형제의 집상(執喪)도 이에서 더 할 수 없었다. 외동 아우에게 일과를 시키는 데는 친절히 회유(誨誘)하여 한 번도 질책을 가한 적이 없었고, 애애한 우애가 나중에 이르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일찍이 우졸당(遇拙堂)이라 자호(自號)하여 서실에 걸고 명(銘)을 지어 그 밑에 붙였다가 다시 才學이 모두 한 것이 이 의 실상이니 어릴 때의 마음을 보존해야 당초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하는 으로 고쳐 학문에 정진하는 뜻을 서술하였는데, 이윽고 이는 남에게 알리는 결과가 될까 염려이다면서 아예 때어 버렸다. 21(1695)道伯

學行을 들어 朝廷에 상신하여 別檢으로 擬望되자 공이 듣고 나는 학행에 대한 실제가 없고 학행에 대한 虛名만 있게 되었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하였다. 드디어 이듬해 411일에 48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 공의 孝友에 대한 과 학문에 대한 노력을 사람마다 미치기

어려운 바가 이와 같았으니, 당시에 大君子(여기서는 寒水齋를 이름)嘆賞(크게 탄복하여 칭찬하는 것)을 받았음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榮達을 구하지 않고 山林에 묻혀 조금의 원망도 걱정도 없었으니, 어찌 만나기 쉬운 인물이겠는가? 영조 11(1735)에 연신(筵臣-經筵을 관계하는 관원)의 주청으로 司憲府 持平追贈되었다.

夫人 善山金氏護軍 진수(震燧)의 따님이요, 承旨公玄孫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식견과 도량이 있었고, 공에게 온 뒤에는 媤母를 조심으로 섬기고 조상을 정성으로 받들었으며, 공은 늘 문을 닫고 글만 읽을 뿐 살림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부인이 모든 것을 스스로 담당하여 집안일로써 공의 누가 되지 않도록 하였고, 공이 별세한 뒤에는 네 아들이 어리어 가문을 유지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과부의 자식으로써 명성이 없는 자와는 서로 사귀지 말라는 고인의 말을 들어 여러 아들들을 경계하는 한편 으레 공의 의지와 사적을 곁들여 격려하곤 하였으며, 큰 흉년이 들었을 적에는 유기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길렀다가 그 아이가 장성한 뒤에 常漢의 자식이 아님을 알고는 그 文券을 소각시키고 보내 주었으니, 이는 다 여느 부인의 미칠 바가 아니다. 참으로 女中士行(여자로써 선비의 행이 있다는 뜻)이라 이를 만하다. 드디어 영조9(1733) 정월 4일에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아들은 世虎, 世龍, 世鳳, 世鵬인데 世鵬進仕이고, 딸은 蔡昌徵에게 출가하였다. 이어 목(), (), (+)와 김처선의 처는 世虎의 소생이고, (+), (+)과 김식의 처는 世龍의 소생이고, , 부와 박동권의 처는 世鳳의 소생이고, 임은 世鵬의 소생이며, 命千, 命洪, 命五(우졸당 행장에는 命武로 되어있음)와 서광한의 처는 채창징의 소생이다. 공의 네 아들과 여덟

손자가 한 집에 지내면서 학문을 강론, 어버이를 봉양하고 和氣 또한

융융(融融)하므로 향리에서 그 효우를 찬양하는가 하면,世龍, 世鵬

先正(한수재를 이름)門下에 수업하여 모두 사림의 推重이 되었는데 世龍은 지극한 효행으로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마침내 죽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평소 진실한 이 일신에 축적되어 가정을 교화시킨

결과이다. 그리고 공의 아우 또한 이 고매(高邁)하여 戊申變亂(영조 4년에 있었던 이인좌(李獜佐의 반란을 이름)때에 갈팡질팡하는 守令을 의리로써 설득시켜 적의 길을 가로막게 하였으니, 이 역시 공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공을 알려고 하는 이는 여기에 증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한다.

孔子曾子으로 된 大學에 나아가는 門戶이므로 공은 대학을 배우지 않으면 학문하는 길이 어둡다 말하고, 16년 동안 줄곧

읽어 수만 번이나 돌파하여, 가슴속에 한 책의 대학이 영롱(玲瓏)하게

투철되어 있으니, 어찌 송나라 윤돈(尹焞)이 대학을 자기의 말처럼 외웠던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고고한 操行은 효우로써 그 근원을 삼아

아내가 和樂하고 형제가 본받았으니, 가정의 교화를 본다면 공의 학문을 인정 할 수 있네. 일신의 할 일은 다했건만 수명이 짧은 데야 어찌할꼬. 先師가 글로 特書해 탄복하였으니, 그 실체가 없었다면 어찌 이 推仰

받을 수 있을 손가? 내가 이 비문 맡게 되었으니 나의 이 글 조금도

무색하지 않누나.

숭정기원 이후(崇禎紀元 以後) 영조 21(1745)에 파평 윤봉구(坡平 尹鳳九)가 찬(撰)하다.

*윤봉구(尹鳳九) 숙종7(1681)-영조43(1767),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구임(久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