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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오봉산 또는 박작대기산이라 불리는 침산(砧山) 이야기

by 안천 조각환 2022. 11. 22.

침산(砧山)은 금호강과 신천의 두 하천이 만나는 대구의 북쪽에 위치한 산이다.

침산이라는 지명은 산의 생긴 모양이 다듬잇돌 방망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해발 121m로 나즈막한 침산은 오봉산, 와우산, 박작대기산, 수구막이산 등으로도 불린다.

 

침산정의 저녁노을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였던 서거정 선생은 침산의 저녁노을을 보고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침산만조" 즉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이라는 

유명한 칠언절구의 한시를 읊었다.

 

침산정(砧山亭)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조선 전기에 형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다.

 

서거정의 "침산만조(砧山晩照)" 시비

 

서거정이 노래한 대구십영(大丘十詠)중 침산만조(砧山晩照) 

물은 서쪽으로 흘러들어 산머리에 다다르고  /  수자서유산진두(水自西流山盡頭) 
푸른 침산에 맑은 가을빛 어리었네  /   침만창취속청추(砧巒蒼翠屬淸秋)
해질녘 바람에 어디서 방아소리 급한고  /  만풍하처용성급 (晩風何處舂聲急)
저녁노을에 물든 나그네 시름만 더하네  /  일임사양도객수(一任斜陽搗客愁) 

침산의 노을

 

침산은 시민들의 휴식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도심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전망대와 침산정에 오르면 대구 시내와 팔공산, 금호강 등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박작대기산이라고도 부르는 침산은 박중양을 빼 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곳이다.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관료 겸 정치인이다.

 

침산정 위에서 보는 저녁노을

 

우선 박작대기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보면

중양이 경상북도관찰사 재직시 국유지인 침산을 불하 받았는데

당시 신 문물의  개화장(開化丈)이라는 지팡이를 집고 다니는것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박중양은 자기가 타는 인력거에 박(朴)이라는 글자 깃발를 달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온갖 거드름을 피우는지라 경상도 말로 박 작대기(지팡이)라 불렀으며 

침산에 저택과 정자는 물론 선대 묘소까지 옮기자, 박작대기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박중양은 1897년(고종 34년) 관비유학생으로 약 7년간 일본에서 유학하였는데,

도꾜중학교를 수료하고, 청산학원(靑山學院,아오야마학원) 중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이 무렵 그는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는데,  

체류 중 어느 날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져 몹시 위급해졌을 때,

박중양이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주었으며, 박중양은 어떠한 대가도 사양하고, 

값진 선물을 주었지만 이마져도 사양하였다. 이때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부인을 구한 박중양을 각별히 신뢰하게 되었다.

 

침산정 오르는 길

 

이후 박중양은 조선 초대 통감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아들이라고

알려졌지만, 박중양 본인은 수양아들은 아니고 그냥 은사였다고 말했다 한다.

1903년(광무 6년)부터 1년간 일본의 관료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료가 되었으며, 러.일 전쟁시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종군하였고,

그 뒤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언변으로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노을속의 침산정

 

1905년 농상공부 주사, 1907년 대구 군수, 평안남도관찰사 겸 세무감,

1908년 경상북도관찰사, 1910년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1915년 중추원찬의를 지내다가 1921년 황해도지사, 1923년 충청북도지사,

1927년 중추원 칙임참의, 1936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으며, 1945년 4월 칙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35년판 "조선 공로자 명감"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 25년간

최고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침산정에서 보는 북대구 IC 방향 야경

 

그는 일본어와 러시아어,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약간의 영어로도 대화할 수 있었다.

술을 좋아하여 한번에 맥주 60병을 마셨고 소주는 40병까지 마실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태백, 보리술 지사 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었다.

그는 대구 오봉산 정상에 정자를 짓고 일소대(一笑臺)라 이름하였다. 

일소대란 이름은 박중양이 지은 것으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독립된 것처럼 자랑하는 것을 조롱하여 "한번 크게 웃는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금호강 야걍

 

지금의 침산정 앞에는 타원형 화강암에 박중양이 친필로 쓰고 새긴 "일소대"라는 석비와

1943년에 세운 박중양의 친필 기념비가 함께 소재해 있었다고 한다. 

해방후인 1949년 1월 침산동 자택에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 반민특위에 기소,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침산정 야경

 

박중양(朴重陽,1872~1959)은 만년에 오봉산 침산장(砧山莊)에 은거하였는데, 

폐질환 등으로 고생하다가 1959년 4월 자택에서 사망하여 오봉산 제2봉에 묻혔다. 

1996년 10월부터 서울 도곡동에 살던 박중양의 증손자가 오봉산에 있던

여러 시설물들을 철거하기 시작했고, 1999년 박중양이 살았던 집인 침산장도

친일파가 살던집이라 하여 철거당했으며, 2004년 다시 친일파로 규탄 받으면서

증손자에 의해 선대의 묘는 이장 또는 화장되고, 그의 묘도 화장히었다.

이후 침산공원이 조성되고 침산정이 건립되었다.

 

침산정과 앞의 침산만조 시비

 

침산정과 저녁노을

 

바로 앞은 구암서원이 있는 연암산, 멀리는 팔공산

 

침산정 마루에서 보는 대구 앞산과 시내

 

파동과 가창 쪽

 

북대구IC와 가산산성 쪽

 

금호강과 팔공산

 

침산정 오르는 계단길

 

직선으로 된 계단길은 돌계단 230여개와 하부의 데크계단을 합쳐 총 300여 계단이며

이 외에도 여러갈래의 산책로와 운동시설 등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찾고있다.

 

망배단(望拜壇)  ~ 실향민들을 위한 제단

 

침산공원 신책길

 

단풍길

 

야외극장

 

대구(이월드)타워를 보며 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