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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그곳에 가고싶다/대구.경북권

연귀산 거북바위와 구암서원에 얽힌 이야기

by 안천 조각환 2022. 11. 21.

대구 제일중학교(구 제일여중)에 있는 거북바위는 머리를 앞산 쪽(남쪽 방향)으로

꼬리는 팔공산 쪽(북쪽 방향)으로 향해 있는 자색(紫色) 사암으로 만든 거북바위인데

이곳은 비슬산과 팔공산의 지맥을 통하게 한다는 연귀 또는 연귀산이라 불렀다.

 

연귀산 거북바위

 

또한 대구는 불기운이 강한 곳이어서 화재가 자주 일어났으며, 그 화기(火氣)를

다스리기 위해 물의 신에 해당하는 거북이를 만들어 비보(裨補)를 한 것이다.

1530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도호부 산천(山川) 조(條)에, 연귀산은

부의 남쪽 3리에 있는데, 대구의 진산(鎭山)이라고 되어 있어, 곧 주산임을 알수있다.

 

앞에서 보는 거북바위

 

연귀산 거북바위는 고문헌에 기록된 대구 최초의 유물로써 대구의 보물이다.

또한 조선 순조 때는 연귀산에서 오시(午時, 낮 12시 전후)를 알리는

포를 쏘았다고 해서 오포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앞산을 향한 거북바위

 

대구 출신으로 조선전기에 형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등을 역임한 신이며

대문장가인 사가 서거정(徐居正,1420~1488) 선생은 대구십영(大丘十詠)에서

연귀산과 거북바위에 대한 시(詩)를 읊조렸다. 

 

귀수춘운(龜岫春雲)  /  연귀산의 봄구름  


귀잠은은사오잠(龜岑隱隱似鼇岑)  /  거북 봉우리 은은하여 자라 봉우리를 닮았는데
운출무심역유심(雲出無心亦有心)  /  무심히 피어난 구름 또한 의미가 있네.
대지생령방유망(大地生靈方有望)  /  대지의 생명과 영혼들이 사방에서 바라는데
가능무의작감림(可能無意作甘霖)  /  아무 뜻 없이 단비를 내리겠는가.

 

연암산 구암서원(龜巖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은 조선후기인 1675년(숙종 1)에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당초 연귀산(連龜山) 기슭(현 제일중학교 일원)에 창건한 서원이다.

구암이라는 이름도 아마 거북바위 아래에 세워졌다고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1718년 동산동으로 이건(옮김) 하였으며, 이때 서거정(徐居正)을 추가 배향하였다.

1741년 서성(徐渻), 1757년 서해(徐嶰), 2008년에는 서사원(徐思遠)을 추가 배향하였다.

 

서원 입구의 관리동인 백인당(百忍堂)

 

그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사당)와 강당을 중수하였고

1996년에 현재의 위치인 산격동 연암산(구 경북도청 뒤)으로 옮겨 지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현사(崇賢祠), 신문(神門), 강당 등 두루 갖추고 있다.

 

연비루(燕飛樓)

 

구암서원에 배향된 서침(徐沈)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로, 정몽주(鄭夢周)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 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

 

연비루 아래

 

조선 세종대에 서씨 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였던 달성을, 임금께서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고 하면서, 성을 쌓기 위해 서침의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는데, 서침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臣)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 라고 사양하고는

일가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 보다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대구지방의 환곡이자(還穀利子)를 한섬(10말)에 다섯되씩 감해 주시기를 청했는데,

임금의 윤허를 받아 실시 하게 되어, 대구부민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었다.

 

구암서원(龜巖書院) 강당인 초현당

 

이로 인하여 인근주민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등이 하사되었고,

관료로 탁용되게 되었다. 1433년(세종 15)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다음 해에 전라도처치사가 되었다.

구암서원은 이러한 구계 서침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 강당에서 바라보는 대구시가지와 왼쪽의 동재, 오른쪽의 서재 건물

 

동재인 경례재(耕禮齋)

 

 동재건물 앞

 

서재인 누학재(耨學齋)

 

서재건물 앞

 

전사청(典祀廳, 향사나 제례때 제수를 관리하고 장만 하는곳)

 

숭현사(사당) 전경

 

사당 신문(神門)인 경앙문(景仰門)

 

숭현사(崇賢祠)

 

숭현사에는 서침과 서거정, 서해, 서성,서사원 등 5분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다

 

서원강당 옆 비각

 

왼쪽은 구암서원 이건 사적비, 오른쪽은 구암서원 묘정비명

 

비각 아래쪽의 석비

 

족회비(族會碑)와 관찰사 서상국 희순거사비

 

강당 측면

 

자손번창을 기원하며 심은 석류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시조는 서진(徐晉)으로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에 올라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며,

달성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세거하게 되었다.

이후 아들 도관좌랑 서기준(徐奇俊)과 손자 찬성사(贊成事) 서영(徐潁)까지 3대가

달성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달성에 세거하게 되어 본관을 달성으로 하였다.

 

 

연비루

 

시조 서진(徐晉)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서기1260~128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으며, 유허비는 대구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4세 서균형(徐鈞衡,1340~1391)은 고려조의 문하평리(門下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1391년 양광도관찰사가 되었다.

 

연비루 내부

 

구암서원에 배향된 5세 서침(徐沈)은 조선조에 전의소감(典醫少監)을 거쳐

전라도처치사를 지냈으며, 세종조에 달성을 나라의 관방으로 쓰겠다며

거두어 들이고자 할때 그 보상받기를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부민들의 부담을

감해 주게함으로써, 서침의 박시제중(博施濟衆)에 감복(感服)한 사림(士林)들이

구암서원을 건립하고 서침을 봉안하여 매년 제향하였다.

세종대왕은 회화나무를 심어 서침의 마음을 기리게 했는데

현재 달성공원 내에 있는 서침나무가 그 나무로 알려져 있다

 

백인당

 

참고로 달성서씨는 고려 멸망 후에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경파는 서한(徐閈)을 시조로 하고 조선조에 벼슬에 나아가 조정에 출사한

계통을 말하는 바, 뒤에 대구 서씨(大丘徐氏)로 부르게 되었고,

향파는 서진(徐晉)을 시조로 하며 절의를 지켜 출사(出仕)하지 않고

영남 일원에서 세거한 계통으로 달성서씨로 부르게 되었다.

 

언덕 아래에서 보는 동재건물

 

구암서원은 경사가 심한 연암산 비탈면에 흙을 돋우어 조성하였는데

신천과 앞산을 굽어보고 있어 대구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