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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누.정.서원.향교

옥천 청풍정(淸風亭)과 김옥균의 애잔한 이야기

by 안천 조각환 2022. 12. 2.

청풍정은 옥천 군북면 석호리 대청호반에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정자이다.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고려시대부터 선비들이 자주 찾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특히 조선말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풍정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곳으로, 물이 굽이쳐 흐르는 바위절벽 위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청풍정(淸風亭)

 

청풍정에는 김옥균(金玉均,1851∼1894)과 기생 명월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업식 연회를 기회로 김옥균은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사대당 거두들을 죽인 뒤 신정부를 조직하고 호조참판 겸 혜상공국 당상이 되었으나

청나라가 군대를 보내 정변을 막는 바람에 삼일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대청호반의 청풍정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은 옥천 청풍정에서 울분을 달래며 은거했는데,

이때 명월이라는 기생과 함께 내려와 정치적 야망을 키우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청풍정 정면

 

그러던 어느 날 명월이는 짧은 글을 남기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그 유서에는 "김옥균과 함께 있던 세월이 일생에 영화를 누린 것 같이 행복했지만,

자기로 말미암아 선생이 품은 큰 뜻에 누를 끼칠까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하며, 김옥균은 이 사실을 알고, 명월이의 장사를 치룬 뒤,

청풍정 아래 검은바위 절벽에 "명월암(明月岩)" 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청풍정(淸風亭)

 

정자 마루 위에서 보는 대청호

 

정자아래 월명암을 찾아본다

 

기암괴석을 돌아

 

절벽사이로 돌아가면

 

앞의 큰바위가 명월암이다

 

기생 명월이와 김옥균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명월암

 

김옥균이 썼다는 명월암(明月岩)

 

김옥균(金玉均,1851∼1894)은 1851년 음력 1월 23일 충남 공주에서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김병태와 송시열 가문인 은진송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태어닜을 때 얼굴이 백옥같이 맑고 아름다워 이름을

옥균(玉均)이라 지었다고 하며, 자는 백온(佰溫), 호는 고우(古愚) , 고균(古筠)이다.

6세 때에 종숙이며 좌찬성을 지냈던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간다. 

 

김옥균이 태어나서 6세까지 살았던 생가지는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이며,

원래 이곳에는 김옥균 생가를 비롯하여 8∼9호의 민가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김옥균 선생 유허(遺墟)지만 있다고 한다.

 

김옥균은 조선시대 말엽의 정치가로, "양반과 상놈의 구별없는 평등한 사회,

열강의 지배를 받지않는 근대조선"을 꿈꾸었던 혁명가였으며, 위로부터의 개혁을 외치며 

급진개화사상을 주장, 고종 21년(1884)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만에 실패당한다.

 

 1894년에는 한·중·일 삼국의 제휴라는 삼화주의를 주장하였으나,

청나라 원세개(이홍장 휘하 조선 조재 청국 공사)의 동양 평화 주장 의견이라는

서한 한 통을 읽고,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을 만나러 상해를 방문하던 중

1894년 3월 28일 상해 동화양행(東和洋行) 2층의 한 객실에서 수구파 자객

홍종우(洪種宇)의 리볼버 권총 3발의 총탄을 맞아 허무하게 4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김옥균의 시신은 청나라 군함 위정호에 실려 조선으로 송환되어 형장인 한강변

양화진에서 다시 여섯토막(六屍)을 내고 머리는 효수되는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 이라 쓴 깃발을 날려 한강변에 전시하였다.

그리고 육시를 나누어 끌고 팔도 시장을 고루 다닌끝에 버림으로써 시신은 사라졌다.

 

대청호

 

이후 일본에서 김옥균을 후원하는 지지자들이 모여 김옥균의 옷과 머리털, 흙을 구해

일본 동경의 청산(靑山) 외국인묘역에 무덤을 만들고 높이 3m, 폭 1m 크기의 묘비를 세웠다.

같은 사상을 가졌던 개화당 유길준(兪吉濬)은  "비상한 능력을 갖고, 비상한 시기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었던 사람" 이라고 비문을 지어 묘비에 새겼다.

오호 포비상지재(嗚呼 抱非常之才), 우비상지시(遇非常之時),

무비상지공(無非常之功), 유비상지사(有非常之死)

 

한폭의 그림같은 청풍정과 대청호반

 

김옥균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후에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무대신 서광범의 상소로 반역죄에 대해 사면받았으며,

1910년에는 규장각 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1914년에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은 일본에서 옷과 유발을 수습해와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김옥균의 무덤을 만들고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