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서원(文獻書院)은 이곡(李穀),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94년(선조 27) 창건한 서원으로
충남 서천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한산 고촌으로 이건 복원하여
1611년 文獻(문헌)이라고 사액(임금이 서원 이름을 내림)되었으며,
이종학(李鍾學), 이개(李塏), 이자(李耔)를 추가 배향하였다.
문헌서원 홍살문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그 자리에 설단(設壇)하고 분향하여 오다가
1969년 지방유림이 복원하여 이종덕(李種德)을 추가 배향하였다.
문헌서원 전경(2023.3.2)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
4칸의 진수당(進修堂), 3칸의 목은영당(牧隱影堂), 5칸의 재실(齋室),
3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수호사(守護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이색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 등이 있다.
문헌서원 외삼문인 진수문(進修門)
사우에는 이색, 이곡을 주벽(主壁)으로
이종학·이자·이개·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재실인 진수당은 유림의 회합 및 학문토론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8변(籩) 8두(豆)이고, 재산으로는 전답 2,000여 평,
임야 6,000여 평과 목은영당 대지 1,500여 평 등이 있다.
문헌서원 강학당과 동.서재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이다.
강학당인 진수당(進修堂)
목은이 말년에 고려 망국의 한을 담은 "회구가"
백설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서서 갈곳 몰라 하노라
남산에 비갠후에 청려장 들어 짚고 올라가니
백조는 남남하고 굽이굽이 물소리로다.
이이야 우후산경이 석양에 잠기도다.
사람의 선악이 다 마음 심지에 있으니
마음 어질면 사람 사나울까
아마도 사나운 후에 어질 일이 없느니.
진수당 강학당과 문헌서원(文獻書院) 편액
여강술회(麗江述懷)
천지는 가이없고 인생은 덧없음을
홀연히 돌아갈듯 어디로 가야하나
여강 한 구비 산은 마치 한 폭 그림 같아
반 은 그림인 듯 반 은 시 인듯
천지무애 생유애(天地無涯 生有涯)
호연귀지 욕하지(浩然歸至 欲何之)
여강일곡 산여화(驪江一曲 山如畵)
반사단청 반사시(半似丹靑 半似詩)
*참고로 여강(驪江)은 여주를 휘감아 도는 남한강을 말하며,
검은 말(여,驪)을 닮은 강(江)이라는 뜻의 여강은
구비구비 375km의 남한강 물길 중 여주 지역 40여 km 구간을 말한다.
동재인 존양재(存養齋)
목우당정기 중에서
눈은 외로운 배에서 도롱이를 쓰고 있을 때 아름답고
설야재고주 사립위익가(雪也在孤舟 蓑笠爲益佳)
달은 높은 다락에 앉아 술잔 기울일 때 흥이 나고
월야재고주 준주위익가(月也在高樓 樽酒爲益佳)
바람은 낚시줄을 드리우고 있을 때 그 맑음이 한층 더하고
풍재조사칙 기청야익청(風在釣絲則 其淸也益淸)
꽃은 책상 머리 앞에서 바라볼 때 그윽함이 더하리라
화재서탑칙 기유야익유(花在書榻則 其幽也益幽)
서재인 석척재(夕惕齋)
견회(遣懷) ~ 회포를 풀다
어느새 훌쩍 지난 반백년 동해 구석진 곳에서 허둥대었네
견홀백년반 창황동해우(倏忽百年半 蒼黃東海隅)
나의 생은 본디 움츠리고 살았다만 세상살이 또한 기구 하였네
오생원국척 세로역기구(吾生元跼蹐 世路亦崎嶇)
백발이야 어느 때나 있는 것이고 청산이야 어디 간들 없으랴마는
백발혹시유 청산하처무(白髮或時有 靑山何處無)
나직이 읊조리니 생각 그지없어 마른나무 등걸처럼 우두커니 앉아있네
미음의부진 올좌사고주(微吟意不儘 兀坐似枯株)
사당 내삼문인 경현문(景賢門)
사당인 효정사(孝靖祠)
이곡과 이색을 주벽(主壁)으로 이종학·이자·이개·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재실 정문 누각인 강륜당(講倫堂)
영모재(永慕齋,재실)
교육관인 가목관(稼牧館)
장판각
목은 이색선생 신도비
영당 출입문
목은선생 영당(牧隱先生影堂) 건물
목은선생 영당(牧隱先生影堂)
목은선생 영정
목은 이색(李穡,1328년∼ 1396년)선생의 묘
목은 선생은 1328년 경북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에서 태어나
1396년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으며, 묘는 충남 서천 기산면 기린산 아래에 있다
이색선생은 고려후기의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서 고려의 멸망과 함께 은둔하였다.
저서로 목은문고(牧隱文藁), 목은시고(牧隱詩藁) 대표작으로 부벽루, 독두시 등이 있다.
이색 후손의 참배
목은 이색 상(牧隱 李穡 像)
이색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과거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귀국해서 고려의 대신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년) 때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아들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유배되었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그를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사망했다.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여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색의 묘 바로 아래에 있는 그의 셋째 아들 이종선(1368~1438)의 묘
이종선(李種善)의 자는 경부(慶夫). 할아버지는 우문관대제학
(右文館大提學) 이곡(李穀)이고, 아버지는 이색(李穡)이며,
어머니는 명위장군(明威將軍)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사위이며 벼슬은 좌랑, 정랑, 수령, 호조참의, 인수부윤,
한성부윤, 함길도관찰사, 판한성부사, 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이섹선생 신도비와 이색,이종선 묘
문헌서원 전경, 왼쪽 기린산 기슭에 이색의 묘가 있다.
한산 이씨의 시조는 이윤경(李允卿)으로 고려 숙종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6세손 이곡(李穀)이 1320년(충숙왕 7년) 과거에 급제하여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의 아들인 이색(李穡)은 7세손으로 1353년(공민왕 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이르렀고, 1391년(공양왕 3년) 한산부원군에 책봉되었다.
한산 이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95명, 상신 4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2명을 배출하였다.
연못과 비림(碑林)
목은 이색과 영덕 괴시리와의 인연은
이색의 아버지인 가정 이곡선생이 괴시리에 살던 함창 김씨와 혼인을 하였는데
그의 장모 즉 이색의 외할머니가 영양남씨 였으며, 이색은 외가인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목은 이색이 태어난 집터에 고택 한 채를 옮겨놓아 그를 기리는 공간으로 해 놓았다.
서원 입구의 문헌전통호텔
문헌서원 전경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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