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영취산 백하암은 신라 문무왕 10년(66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사명대사는 백하암과 포충비가 있는 이곳 밀양 무안면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임응규인데 15세 무렵에 갑자기 부모를 여의게 됨에
17세 되던 1560년 3월 직지사를 찾아 신묵화상(유정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18세에 선과에 급제하고 19세가 되던 3월에 부모님 산소에 왔다가
이곳 영취산 백하암 바위굴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백하암(현 대법사)
그 후 묘향산으로 서산대사를 찾아갔는데 "그대 기다린지 오래다.
그대가 나의 문을 두드리니 내 어찌 문을 열지 않으리" 하였으며,
뒤에 증표로 가사와 바루를 받고 전법제자가 되었으며,
법호는 송운, 종봉, 사명당, 시호는 자통홍제존자 이다.
천왕문
임진왜란 시 "선교양종 팔도도총섭"을 제수받아 전국의 호국승병을 지휘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의 국서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 3천 5백명을 데리고 왔다.
선조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호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이곳 영취산 백하암에 표충사당을 지어 하사 하였다.
사명대사는 1610년 67세를 일기로 해인사 홍제암에서 열반(별세) 하였다.
백하암 범종각
그 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백하암과 사당은 퇴락하였는데
1839년 월파스님이 이곳 표충사당 유품과 재산을 모두 현 표충사로 옮겨가고
표출사당 유지만 남았었는데 1969년 원공스님이 재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있다.
백하암 호국범종
이 호국범종은 나라에 많은 인명피해와 난이 있을 때 마다
땀을 흘리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오층석탑과 대웅보전
보광전과 전설의 모과나무
이 모과나무는 사명대사가 백하암에 머물 당시 짚고 다니던 모과나무
지팡이를 꽂아두고 "이 나무가 살아있으면 나의 기상이 살아있음을 알라" 고
하였는데, 그 모과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튼튼하게 자라고있다.
용왕각
붉게 익은 꽈리
비구니 스님들의 텃밭에 자라는 산나물과 더덕꽃
백하암 전경
백하암을 뒤로하고
무안면 표충비
표충비는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으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린다.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으로 가서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했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을 통솔했다.
표충비각
표충비는 1742년 10월 사명대사의 5대손인 남붕선사가
경북 경산에서 돌을 가져와 현재의 자리(밀양 무안면)에 세운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cm, 비신의 높이가 275cm, 너비 98cm,
두께가 56cm나 되는 큰 비석이다.
표충비 전면과 왼쪽 측면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 병서"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 사적기"를 음각했다.
비문에는 표충사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놓았는데, 사명대사가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병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사마와의 담판내용, 선조의 명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등을 적고있다.
뒷면과 오른쪽 측면
표충비 땀 흘린 역사
밀양 무안리 향나무
이 향나무는 1742년 나라를 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표충비를 세울때 함께 심은 나무로 수령이 300여 년이나 되었다.
높이 1.5m, 가슴높이 들레 1.1m 이며, 곁가지를 다듬어 우산처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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