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예의범절/梅溪 曺偉 先生128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70)신차소가 옥당으로 돌아감을 축하하며 매계 조위선생은 "신차소가 옥당으로 다시 돌아가는것을 축하한다는 시" 를 지어 그에게 보내주어 축하하였다. 당시에는 자리를 옮기거나 영전할 때에 친한 사람끼리 시를 지어 역마를 통해 서로 보내주거나 받고 하는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 시는 1491년 신종호가 대사헌으로 있을 당시 북쪽 오랑캐 침입 사건에 관한 어전회의 중에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면되어 마음고생을 하다가 그 뒤 다시 등용되어 입궐하였는데, 이 때 매계선생은 충청도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축하시를 지어 보내준것 같다. 신차소가 다시 옥당으로 돌아가는 것을 축하하며 (賀申次韶復入玉堂)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손에 야광주를 들고 규성에서 내려와 인간 세상의 빛나는 신선이 되었네. 붓끝의 무지개는 태양을 나란히 꿰고 가슴속에.. 2020. 5. 24.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9)박익부의 시에 차운함 아래 두편의 시는 그 내용으로 보아 매계 조위선생이 지방의 관찰사로 재임하는 시절에 읊은 시인것 같다.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어 가고 귀밑에 흰머리는 자꾸 늘어만 가는데 공무에 바빠 한가로이 시도 짓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과 지방에서 근무하며 겪는 여러 고충들이, 지난날 궁궐의 임금곁에서 근무하던 때의 추억들과 뒤썩여 회한과 아쉬움들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박익부의 시에 차운함(次朴益夫韻)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객지에서도 당당히 계절은 변화를 재촉하고 제비와 기러기가 구름 속에서 슬피 우는 소리에 깬다. 화창한 봄빛은 길가 버드나무를 푸르게 물들이고 꽃 소식은 시냇가 매화나무에서 먼저 알려온다. 客裏堂堂節序催(객리당당절서최) 夢驚燕雁叫雲哀(몽경연안규운애) 韶光欲染街頭柳(소광욕염가두류) 芳信.. 2020. 5. 20.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8)속리산 수정봉탑에 오르며 수정봉은 법주사를 에워싸고 있는 속리산의 천왕봉을 비롯한 여러 봉우리중 하나인데 현재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이 서 있는 바로 뒤 산봉우리로 높이는 566m이다. 매계 조위선생은 수정봉에 올라 오래된 탑을 둘러보며 당시의 풍광과 감회를 한편의 시로 남겼는데 아마도 1494년 충청도관찰사 재임시 속리사(법주사)에 들렀을때 안개속을 뚫으며 학을타고 정상에 올라 선경에 온듯 비경을 감상하며 이 시를 읊은것 같다. 그 옛날 매계선생이 노래했던 구름위로 오른 수정봉의 탑은 흔적만 남겨놓아, 전설속에서 그려볼 뿐이다. 수정봉 탑에 오르며(登水精峰塔)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우뚝 구름위로 오른 오래된 탑 亭亭古塔入雲端(정정고탑입운단) 손으로 잡고 올라 돌난간에 기댄다. 引手擧登倚石欄(인수거등의석란) 움푹.. 2020. 5. 15.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7)수영의 수각에서 짓다(題水營水閣) 수영의 수각에서 짓다(題水營水閣)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만경창파는 위아래로 넘실거리고 화당은 북두성과 견우성 곁에 있는 듯 누워서 새벽달에 쇠기둥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일어나 맑은 바람에 채색 깃발이 가득한 것을 소리친다. 萬頃波涵上下天(만경파함상하천) 華堂疑在斗牛邊(화당의재두우변) 臥看落月搖金柱(와간낙월요금주) 起喚淸風滿彩旃(기환청풍만채전) 몇 척의 어선에서 빛나는 등불은 어둠 속에서 명멸하고 꼭두새벽부터 호각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진다. 신선들이 사는 땅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한가로이 노를 저어 찾아갈 것을 만년에 기약한다. 數點漁燈明乍暗(수점어등명사암) 五更畵角斷還連(오경화각단환연) 十洲三島知何處(십주삼도지하처) 一棹幽尋擬晩年(일도유심의만년) 2020. 5. 13.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6)보령 남포(藍浦) 남포현은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웅천면·주산면· 미산면·성주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로 백제시대에는 사포현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남포현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 병마사 겸 판현사를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 현을 설치했으며 별호는 마산이었다. 1896년에 남포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포군은 폐지되고 보령군에 편입되어 남포면이 되었다. 남포읍성은 서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위해 1390년(고려 공양왕 2년)에 처음 군영을 설치 축성하였고, 조선시대인 1451년(문종1년)에 석성을 건립하여 병마첨철제사를 두어 현사(縣事)를 겸하게 하였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진 성곽과, 성안 동북쪽에는 관아문과 진서루(鎭西樓), 동헌건물이 남아 있으며,.. 2020. 5. 7.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5)친필 시(親筆 詩) 이 글은 조위선생(曺偉 先生)이 읊은 수많은 시 중에서 직접 써서 남아있는 유일한 친필 시가 아닐까 한다.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외직에 나와 있을 때 성종임금께서 아프다는 소식과 또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의 놀랐던 마음과, 기쁜 마음을 글로 써서 남긴것으로 보인다. 오래전부터 찬성공파 족보에 올라 있었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중, 이번에 조지환(曺智煥) 우졸당 종회장이 한학자 지인을 통하여 어렵사리 번역하였기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올리게 된것이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유선의 깃발과 부절이 하늘에서 내리니 儒仙旄節下靑冥(유선모절하청명) 멀리 해를 잡고 지극한 정성 의지하네. 遠搏扶桑仗至誠(원박부상장지성) 만리에 고생하니 해가 솟은 듯 하였고 萬里間關廓日出(만리간관확일출) .. 2020. 5. 3.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4)속함(速含,현 함양)에서 속함은 현재의 경남 함양군일원으로 본래 신라의 속함군(速含郡, 또는 含城郡)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천령군(天嶺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허주(許州)로, 도단련사(都團練使)로, 함양군으로, 또 합주(陜州)에 예속되었다가 다시 현으로 강등되어 감을 두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396년(태조 5)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위성면이 되고, 1957년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속함의 지명유래는 함성과 같은 뜻으로 지리산 동쪽 기슭 산간분지의 지형적 특색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전설에 의하면 함양읍내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함양상림(咸陽上林)은 최치원(崔致遠)이 천령군 태수로 있을 때 홍수를 막기 위하여 심은 것이라 한다. 매계 조위선생은 1484.. 2020. 5. 2.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3)순천 개운산 동화사 순천 동화사는 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개운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선각국사 도선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고 전헤지고 있다. 또한 1047년(고려 문종 1) 의천이 두타행을 닦을 때 석장을 짚고 남유하다가 제석산 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고 개운산이라 하고, 구름이 일어난 곳에 봉황이 오동나무 둥지에 알을 품으려 날아드는 듯한 기운을 받아 절을 짓고 동화사라 불렀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에 법홍이 향로전을 지었고, 1696년(숙종 22) 계환이 법당·선당·정문루·요사채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선당·범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순천동화사 3층석탑은 보물 제831호이며, 의천의 속장경판본 135판도 남아있다. 매계 조위선생이 순천의.. 2020. 4. 28.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2)김제 금구에서 금구는 김제시에 속한 금구면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 백제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전주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의종(毅宗) 24년에 이의방(李義方)의 외향(外鄕)인 까닭으로 현령으로 승격시켰고, 조선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금구현은 동쪽으로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북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8리, 남쪽으로 태인현(泰仁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서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매계 조위선생이 전라도 금구현을 순례한것은 1496년 늦가을이었다. 당시 금구현의 동헌과 객사는 흔적을 찾을길 없는데 아마도 현재의 금구면사무소가 있는 자리로 보인다. 이곳에도 향교는 인근에 남아있어 어렴풋이나.. 2020. 4. 23.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1)장맛비 예나 지금이나 오랜 장마철이 되면 누구나 바깥활동을 하기가 어렵다보니 지루했는가 보다. 요즘은 장마철이 아닌데도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관계로 사회적 거리두기라 해서 모두 외출을 자제하고 거의 집에만 콕 틀어박혀 일상을 잊은체 담장없는 감옥생활로 살아가야하니 답답하기가 그지없다. 엣날 같으면 역병이 오면 인구의 절반은 보통 쓸고 간다고 했는데 오늘날 이 문명세계에서도 온 세계가 난리통이다. 매계 조위선생이 살았던 시대의 장마철 풍경을 시를 통해 떠 올려본다. 장맛비(久雨)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매실 익어가는 시절이라 비는 세차게 내리고 黃梅時節雨翻盆(황매시절우번분) 가끔 굉음의 천둥소리가 먹구름 속에서 울린다. 隱隱轟雷擁峽雲(은은굉뢰옹협운) 원객은 오이덩굴 같은 장대비를 만날까 두렵고 .. 2020. 4. 19.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60)장수 향교와 동헌 매계 조위선생은 1495년(연산군1) 7월 23일 전라감사로 임명되고 8월에 부임한 후, 선생이 남긴 시(詩)에서 "지방관생활 두해 동안 머리는 하얗게 세었는데" 란 내용으로 보아 1496년 늦가을부터 관할지역인 장수, 무주, 금구(김제), 능성(화순), 남평(나주) 영암, 월출산등지를 순례하면서 곳곳에 많은 시를 남긴것으로 보인다. 그 중 장수 순례시에는 동헌에서 허헌지(침)의 시에 차운한 시가 남아있는데, 현재 장수동헌은 없어지고, 그 자리로 보이는 곳에는 장수군청이 있으며 바로 인근에 1407년에 건립한 600년 전통의 장수향교가 남아있다. 분명 이곳 향교 대성전에도 들러 성현들에게 참배했을 것인즉 향교를 돌아보며 어렴풋이나마 매계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장수향교 정문 장수향교는 1407년(태.. 2020. 4. 15.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59)강도회고(江都懷古) 강도회고(江都懷古)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드높이 솟아있는 마니산 푸른 봉우리 摩尼山色翠嶙峋(마니산색취린순) 외로운 성에 왕이 머문 사십여 년 세월 駐驆孤城四十春(주필고성사십) 임금의 깃발을 해교에 머물게는 할 수 있어도 可使翠華留海嶠(가사취화유해교) 백골들을 전쟁터에 버려 둔 것이 마음 아프구나. 傷心白骨委兵塵(상심백골위병진) 봄바람에 임금도 없는 궁궐에는 보리가 패고 春風麥秀升天闕(춘풍맥수승천궐) 달밤이라 갑곳진에는 연기가 낮게 깔린다. 夜月煙橫甲串津(야월연횡갑곶진) 어찌 권간들만 유독 건재했던가? 豈必權奸能獨健(개필권간능독건) 당시에 고기 먹는 사람들 중에 인재가 없는 것이 괴이하구나. 當時肉食怪無人(당시육식괴무인) *강도(江都) : 지금의 강화도 지명 *해교(海嶠) : 바닷가에 .. 2020. 4. 7.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58)매계선생의 선고,선비묘표 매계 조위선생이 36세가 되던 1489년(성종20년) 2월 함양군수로 재직한지 6년째 되는 해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임금께서 부의로 쌀과 콩, 기름, 꿀 등을 하사하였다. 5월에 황간현(현 김천시 대항면)마암산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1493년(성종24년) 6월,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었다. 8월에 정조사(正朝使)로 임명되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함을 이유로 장계를 올려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서, 어머니의 수연(壽宴)을 베풀고 금산(김천)으로 돌아와 살았다. 9월에 선영에 분황제(焚黃祭)를 올렸으며, 아버지의 묘 앞에 표석을 세우고, 비석의 뒤에 관력과 생년월일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선고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행통훈대부 울진현령 부군 묘표 (先考 贈嘉善大夫 吏曹參判 .. 2020. 4. 7.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57)지례객관 지례는 김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면소재지이다. 조선시대에는 독립된 현이었으며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동쪽으로 성주의 경계까지 13리, 서쪽은 무주현의 경계까지 38리, 남쪽은 거창군 경계까지 46리, 북쪽은 금산군 경계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624리다. 로 되어있다. 이곳은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나 대전등지에서 거창이나 함양 진주 방면으로 오가려면 반드시 김천을 지나 이곳 지례를 거쳐 가야만하는 길목이었다. 지금은 향교만 남아있어 과거의 형세를 말해줄 뿐 객사의 자리는 흔적조차 없는데, 아마도 향교 아래쪽 어디쯤일텐데... 선비들이 오가던 그 길은 흑돼지골목길이 되어 유명세를 타고있다. 매계 조위선생은 1475년 봄과 꼭 20년뒤인 1495년에 이곳 지례객관을 지나면서 세편의 시를 남겼다.. 2020. 3. 28.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56)청명과 한식날 매계선생은 청명과 한식날에 읊은 시가 세 수 있는데 한 수는 청명날 한양에서 가까운 농촌마을을 둘러보면서 감회를 담았고 두 수는 성묘를 하고 싶어도 가지못하는 의주와 순천 유배지에서 선현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과 함꼐 꿈속에서도 잊지못하는 고향땅 봉계마을을 그리워하며 몸과 마음은 병들어 애간장만 태우는 심정을 고스란이 담아내고 있다. 순천에서는 아마도 1503년 11월 26일 작고 하기전인 그해 봄 동생 조신이 순천 옥천땅에 왔을때 지어 준 시로 짐작된다. 청명일에 성남에 놀러나가며(淸明 出遊城南)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한식 청명이라 寒食淸明(한식청명) 녹양방초여 무정하구나. 綠楊芳草兮無情緖(녹양방초혜무정서) 복숭아에 알맞게 비가 내리자 小桃和雨(소도화우) 온 마을엔 나무마다 꽃이 피.. 2020. 3. 24. 이전 1 2 3 4 5 6 ··· 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