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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482

대구 유학의 출발점 파동 무동재 대구 파동에 위치한 무동재(武洞齋=계동정사)는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 1585) 선생이 강학한 계동 정사의 옛터로이곳은 대구지역에 퇴계학을 처음으로 전파한 곳이기도 하다. 무동재 전경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 1585) 선생의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계하(季賀), 호는 계동(溪東)이다.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직은 검열, 정언에 이르렀다. *옥산 전씨(玉山 全氏)는 경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며경산 전씨(慶山 全氏)는 옥산 전씨(玉山 全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역락문(亦樂門) 성리학의 태두인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한때 가야산에서 학문 연마에 전념하기도 하였다.대구 연경서원(硏.. 2025. 3. 7.
파동 오천서원과 중화양씨 시조(양포) 제단 파동 무릉계곡(서당골)에 있는 오천서원(梧川書院)을 찾았다. 이 서원은 조선 전기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한 대봉(大峰) 양희지(楊熙止)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1786년(정조 10)에 건립하였다. 파동 오천서원 전경 양희지(楊凞止,1439~1504)의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이며, 1462년(세조 8) 24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종으로부터 희지(稀枝)라는 이름과 정부(楨父)라는 자(字)를 받았다. 오천서원 가는길의 서당골  1498년 좌부승지, 1499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무오사화로 명현들이 화를 당하자 바로 사직하였으며, 1500년에 다시 부총관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때 상소하여 무오.. 2025. 3. 7.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 묘소와 보광사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청송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始祖)로 삼으며, 그의 증손 심덕부(沈德符)가 우왕(禑王)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청송심씨 시조묘소 입구 그뒤 심덕부(沈德符)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원부(元符)는 고려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王.. 2025. 2. 20.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장군 묘역과 유적지 평산신씨(平山申氏=平州 申氏)는 황해도 평산군을 본관으로 하는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고려의 1등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장군이다.신숭겸(?~927)장군의 초명은 능산(能山)이며 전남 곡성현에서 태어났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장군상 신숭겸은 태봉(국)의 장군으로 있다가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함께궁예를 축출하고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다.신숭겸은 활쏘기가 뛰어나 왕건과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가르키며 "저 기러기떼 중 앞에서 세번째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춰보라"고 명하자 그대로 쏴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신숭겸장군 묘역 왕건은 기러기를 화살로 맞추는 모습과  비슷한 한자인 신(申)자를 성(性)으로, 숭겸(崇謙)을 이름으로 하사(사성,賜姓) 하였으.. 2025. 2. 14.
영주 순흥향교 순흥향교(順興鄕校)는 영주 순흥면에 있는 향교로창건시기는 미상이며 처음에 순흥부(順興府) 북쪽 금성(金城)에 창건되었다가 1718년(숙종 44) 동쪽 위야동으로, 1750년(영조 26) 남쪽 석교리(石橋里)로, 1770년(영조 46)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순흥향교 문루인 영귀루(詠歸樓) 현존하는 건물로는 7칸의 대성전, 6칸의 명륜당,각 5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4칸의 동재(東齋), 7칸의 문루(門樓),삼문(三門), 협문(夾門), 주사(厨舍) 등이 있다. 명륜당과 동.서재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의 위패가 동무 · 서무에는송조6현(宋朝六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명륜당 명륜당 강당 내부 대성전 삼문 대성전과 동무.서무 대성전 삼문과 협문 명.. 2025. 1. 12.
순흥안씨 시조 단소와 회헌 안향선생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영주 순흥면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시조는 고려(高麗) 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을 역임한안자미(安子美)이고, 중시조는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지내고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인 회헌 안향(安珦)선생이다.파조는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이다. 순흥안씨 시조 재실 추원재(追遠齋) 순흥면은 영주 소백산 기슭의 현재 소수서원이 있는 일원으로,지명은 조선 초기 설치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에서 유래되었다.시조(始祖)인 안자미(安子美)는 고려 신종(神宗 재위: 1197~1204) 때사람으로 사후에는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는데, 순흥현(順興縣) 토착 가문으로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순흥안씨 시조 세사단(歲祀檀) 단소(檀所).. 2025. 1. 11.
고려와 조선의 향교(鄕校) 이야기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유학(儒學)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공교육기관으로, 유교교육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재사를 지내는 2가지 역할을 맡았으며, 오늘날의 중등교육 기관 또는지방국립대학, 공립대학에 해당되는데, 현재 전국에 234곳이 남아있다. 함양향교 태극루(太極樓) 중앙인 한성부는 직할 특수행정구역 관할이어서 향교가 없었으며,대신에 향교 역할을 하는 4부학당(四部學堂)과 성균관 등이 있었다.학당은 고려 후기에는 개경(개성)에 있었으나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철폐하고, 한성에 동부학당, 서부학당, 중부학당, 남부학당 등 4곳의학당을 세웠는데 현재 건물은 단 한 곳도 남아 있지 않다.  선산향교 청아루(菁莪樓) 향교의 경내 건물로는 우리나라와 중국을 통틀어 어진 인물들의위패를 봉안하고 .. 2025. 1. 7.
원앙새와 노닐다 원앙(鴛鴦)새는 천연기념물 제327호로 지정되어있는 보호종이다.두 마리가 항상 함께 다닌다고 금슬이 좋은 부부를 원앙이라고 한다. 원앙은 아시아에 사는 철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텃새이다. 원앙새 수컷 원앙은 번식기가 되면 수컷에게 아름다운 장식깃이 생기는데,번식이 끝나면 아름다운 갓깃이나 뺨의 장식깃도 떨어지며, 온몸이 암컷과 비슷한 깃색이 된다  겨울의 무리에서는 수컷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이 현상은 암컷이 많은 수컷들 중에서 더욱 아름다운 수컷을 골라 번식행동을 하는 것이 그 원인으로, 수컷 사이에서는 선택되기 위해 아름다움 경합이 벌어져 미화를 촉진하게 된다. 논속의 원앙 암.수 한쌍   원앙새 수컷과 암컷들 눈속에 노니는 원앙새 무리 2024. 12. 29.
재(齋)와 재실(齋室)과 재사(齋舍) 재(齋)와 재실(齋室)과 재사(齋舍)는 거의 같은 의미와 용도로 쓰인다.먼저 재(齋)의 사전적 의미는 "재계하다, 공경하다" 라는 의미인데주로 조상이나 성현 등을 모시고 섬길 때 몸과 마음가짐을 깨끗이하고정갈히  하는것을 이르며, 재실이나 재사를 줄여서 재(齋) 라고도 한다.  1.여주 세종대왕 영릉 재실(2024.1.16) 좀더 그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면 재실(齋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 이라고 하며, 재사(齋舍)란 학문과 덕행, 충효가뛰어난 인물이나 입향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묘소나 사당 인근에 지은 건축물로 정의하고 있다. 여주 세종대왕 영릉(2024.1.16) 세종대왕릉(영릉)의 이장은 세조 때부터 논의되다가1469년(예종 1년)에 와서 현재 자리로.. 2024. 12. 27.
조선시대의 서원(書院)과 서당(書堂) 서원(書院)은 조선시대에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던지방 기관으로 주로 사대부를 대상으로 유학을 가르치고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그 기능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유학을 가르치는 강당, 유학생들의 숙식 등 세가지 공간으로 나뉜다.또 서원은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과 일반서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백운동서원(현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선생  서당(書堂)은 향교나 서원과는 다르게 일정한 규칙이나 조건없이 문중이나 마을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용도와 성격이 정해졌다.주로 7세에서 16세 까지가 가장 많았으며, 천자문을 통한 학습과명심보감, 소학, 사서삼경 등 유학을 배우는 초등 교육기관이었다.2024년에 탐방했던 서원(20)과 서당(5) 25곳을 다시 만나본다 1.청도 금호서원(20.. 2024. 12. 26.
김천 봉계마을 봉암서당과 영천이씨 정려각 김천 봉암서당은 봉산면 봉계마을에 있는 조선전기의 서당이다. 1540년(중종 35) 영일(연일) 정씨 문중에서 만취당 정이교(鄭以僑)를 추모하고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도장서당(道藏書堂)으로 창건하였다.  봉암서당 정문 약 100년 뒤 인종 중엽에 각곡(角谷) 평전(坪田)으로 옮겼다가1757년(영조 33)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고 봉암서당이라고 했으며,1895년(고종 32)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천 봉암서당(鳳巖書堂)  서당 건물은 1,652.9㎡(500평) 정도의 부지에, 66.12㎡(약 20평)의 3칸 겹집 건물이다. 봉암서당 편액 이곳 봉암서당에서는 조선시대에 생원 진사에서 대사성,삼도통제사, 참의, 참판, 판서 등 문무(文武) 정 2품까지 75인의 인재를 배출하였고, 근세에는 육군 .. 2024. 12. 5.
주실마을의 월록서당,만곡정사,지훈시공원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영양군 주실마을을 다시 찾았다.주실마을은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로 인해 전국에 흩어진 한양 조씨 집안 중 일부가 1629년(인조 7년) 태백준령의 오지인 이곳 영양으로 들어와서 터를 잡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월록서당(月麓書堂) 지난번 왔을 때 오후 늦은시간이라 둘러보지 못한 월록서당과 만곡정사, 지훈시공원 등을 천천히 둘러본다.월록서당은 월하 조술도(趙述道,1729∼1803)가 만곡 조술도(趙述道)와함께 1764년에 착공하여 1773년에 완성하였으며, 한양조씨(漢陽趙氏),함양오씨(咸陽吳氏), 야성정씨(野性鄭氏)가 함께 건축하였다.  영산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된 후 영양군에서 처음 지어진 서당이다.당시 서당의 설립은 관변측(官邊側)의 지원없이 순수 민자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 2024. 12. 3.
영양남씨의 뿌리 시조 남민(南敏)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경북 영양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남민(南敏)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인데, 신라 경덕왕 14년(서기 755년), 즉 당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에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에서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갔다가 귀로에 태풍을 만나 영덕(盈德)의 죽도(竹島)에 표착하여 신라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에 신라 경덕왕은 여남에서 왔다고 하여 성(姓)을 남씨(南氏)로, 이름은 민(敏)으로,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내렸다.   영양남씨 시조묘역 입구 증보문헌비고에는 남민의 7세손이며 고려 때 대장군을 지낸 남진용(南鎭勇)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남홍보(南洪甫)는고려 충렬왕 때 도첨의찬성사를 지냈으며, 영양남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차남 남군보(南君甫.. 2024. 12. 3.
영주 삼판서 고택(정도전 생가) 영주 삼판서 고택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세 명의 판서가 연이어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고택의 첫 주인은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 해당)를 지낸 정운경(鄭云敬,1305~1366)으로정운경은 그의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1343~?)에게, 황유정은 다시 외손자인 이조판서 김담(金淡,1416~1464)에게물려주었으며, 이때부터는 김담의 후손들이 계속 살았다. 영주 삼판서 고택 이 고택에서는 3명의 판서를 비롯하여,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이며 정운경의 아들인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정도전 외에도 사헌부 지평 황전(黃銓), 집현전 교리 김증(金曾) 등 많은학자와 명신(名臣)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삼판서의 후손들이다. 삼판서 고택 가는길 삼.. 2024. 11. 30.
안동 풍천 상봉정과 파산정 상봉정(翔鳳亭)은 서애(西厓) 류성룡의 종증손 회당(悔堂) 류세철(柳世哲,1627~1681)이 도학(道學)을 연찬(硏鑽)하고 강론하며 말년을 보내기 위해 1662년(현종 3년) 하회(河回)마을 서쪽 강건너 언덕 위에 세운 정자이다. 안동 풍천 상봉정(翔鳳亭)  서애 류성룡(柳成龍)은 이곳을 흡사 봉이 하늘을 나는 형국이라 하여,상봉대(翔鳳臺)로 이름짓고 정사를 지으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지명을 자호(自號)로 하였던 곳이다. 담너머로 본 상봉정  상봉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가운데 마루를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의 상봉정(翔鳳亭)으로,정자의 이름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이곳 절벽을 "상봉대(翔鳳臺)"라 부른데서 따왔다.  1696년 수해로 대지가 침하되.. 2024.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