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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문화유산산책464

진주성에 얽힌 이야기 보따리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는 촉석성, 조선시대에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촉석루, 의기사, 창열사, 호국사,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촉석문. 공북문,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다. 진주성(북쪽) 진주성은 원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년)에진주 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으며, 조선 선조24년(1591)경상감사 김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성의 둘레길이는 1.7km이다. 진주성(촉석루쪽) 선조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2만여명의 왜적을.. 2024. 5. 26.
퇴계 이황의 덕곡서원과 가례동천(嘉禮洞天) 덕곡서원(德谷書院)은 경남 의령 덕곡촌 입구에 있는 서원으로1654년(효종 5)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있던 윤순거(尹舜擧)가 퇴계선생의 처가가 의령 가례마을이고, 또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기에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1660년(헌종 1) 덕곡(德谷)이라는 사액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되었다.  덕곡서원(德谷書院)  1869년(고종 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1902년(고종 39)에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으며,1992년 부터 2012년에 걸쳐 사당과 동.서재가 복원되었다.이 서원은 경남지역에서 유일하게 퇴계선생을 단독으로 모시고 있으며,매년  2월 20일에 향사를 지내는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덕곡서원 표석  퇴계 이황선생이 .. 2024. 5. 24.
고운 최치원선생의 상서장과 고운대 상서장(上書莊)은 신라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857~?)선생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으로,그는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의 국운을 쇄신하는 경륜을 담은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써서 진성여왕에게 올린곳이다. 상서장 출입문최치원은 그가 12세되던 868년(경문왕 8)에 당나라에 유학하여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헌강왕 11년인 885년에 귀국하여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자 애썼으며, 특히 이때 시무십조를 올렸다. 출입정문과 추모문 사이 또한 왕건(王建)이 개국할 것을 짐작하고 상서하기를“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이라 하였다.신라가 망하고 송도(松都)가 흥한다는 이 글을 보고 왕은 크게 노하였고,최치원은 이후 벼슬을 버리고 경주 남산,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자연과 벗삼아 지내다가 해.. 2024. 5. 16.
진주정씨 충장공파 파조 정분(鄭苯)의 묘 진주 정씨의 원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촌 중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다.그러나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진주 정씨가 여덟 파가 되어 진주8정(晋州八鄭)이라고 한다.  정신중(鄭臣重), 정이오(鄭以吾), 정분(鄭苯) 3대의 묘 진주 정씨(晉州 鄭氏), 진양 정씨(晉陽 鄭氏)는 경남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며, 동래 정씨, 경주 정씨 다음으로 많은(325천여명) 성씨이다.진주 8정(晉州八鄭)으로 불렸던 진주 정씨는 세계(世系)를 달리하는즉 시조를 달리하는 1)정예(鄭藝)의 예계, 2)정헌(鄭櫶)의 헌계, 3)정장(鄭莊)의 장계, 4)정자우(鄭子友)의 자우계 등 4계통, 8파로 계대(繼代)를 이어오고있다. 정신중(鄭臣重) .. 2024. 5. 14.
영천 모고헌(태고와)과 횡계서당, 옥간정 모고헌(慕古軒)과 옥간정(玉磵亭)은 영천 화북면 횡계리에 있는 조선후기의 누.정(樓.亭)으로 보현산 정남쪽 횡계천 벼랑에 세워져 있다.모고헌은 1701년에 지수 정규양(篪叟 鄭葵陽,1667∼1732) 선생이 세웠으며,옥간정은 1717년(숙종 43) 성리학자인 훈수 정만양(塤叟 鄭萬陽,1664~1730)과 지수 정규양(篪叟 鄭葵陽) 형제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모고헌과 횡계서당 모고헌 안쪽에는 횡계서당(橫溪書堂) 현판을 단 강당 한 동과 동재(東齋)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횡계서당은 형제가 세상을 떠난 뒤 1737년 경 서원으로 변모한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서원은 흥선대원군 때 훼철된 후 서당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모고헌(慕古軒)  모고헌은 횡계천 단애(斷崖,벼랑)위에 세워져 있는데.. 2024. 5. 12.
합천 묵와고택 (陜川 默窩古宅)과 육우당(六友堂) 합천 묘산면에 있는 묵와고택은 국가민속문화유산 제 206호이다.이 고택은 가야산에서 뻗어 내린 깊은 산속의 화양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선조 때에 선전관을 역임하였던 윤사성(尹思晟,1557~1619)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고택의 명칭은 윤사성의 고손자인 묵와 윤우(默窩 尹楀,1784~1836)의 호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묵와고택 입구 묵와 고택은 윤사성의 10대손인 독립운동가 만송(晩松) 윤중수(尹中洙, 1891~1931)의 생가이기도 하다. 대문채 대문을 닫아 놓아 내부를 볼수없는 아쉬움이 있었으나문화재청의 설명에 의하면 문간채의 가운데에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가면‘ㅜ’자형으로 동향한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우측에는 중문채가 있다.중문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안채가 있으며, 안채 마당을 지나면.. 2024. 4. 27.
명승 제89호 임대정(臨對亭) 원림 동복현(同福縣) 사평촌(沙坪村)에 집을 지었는데 계산(溪山)의 수석(水石)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 원(園)을 고반이라 하고 자호(自號)를 "고반원 주인(考槃園主人)"이라 했다 남언기(南彦紀, 1534~?)의 "고반유편(考槃遺編)에 있는 글귀이다. 화순 남면 사평리 외남천가의 임대정 원림은 국가 명승 제89호이다. 임대정(臨對亭) 원림 풍경 퇴계 이황으로부터 동방의 도학을 전수할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남언기(南彦紀,1534~?)는 화순 동복현 사평촌에 정자를 짓고 은둔한다. 그는 이 정원을 고반원이라 하고, 자신의 호를 스스로 고반이라 짓는다. 고반이란 시경(詩經)의 위풍(衛風) 고반편에 “고는 이룬다는 뜻이고, 반은 머뭇거려 멀리 떠나지 않는 모양이니 은거할 집을 이룬다"는 말이다 (考成也 槃盤桓之意.. 2024. 4. 2.
호수위의 그림같은 환산정(環山亭) 환산정(環山亭)은 화순군 동면 서성제 호수의 섬에 있는 정자이다. 1637년 백천(百泉) 류함(柳涵) 선생이 창건한 방 1칸의 소박한 초정(草亭) 이었는데, 여러번의 중건과 중수(重修)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아늑한 산으로 둘러쌓인 호수안의 섬위에 지어져 한폭의 동양화같다. 환산정(環山亭) 백천(百泉) 류함(柳涵,1576~1661) 선생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자정(子淨)이며, 호는 백천(百泉)으로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이괄 변란(1624)과 정묘호란(1627) 때에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병자호란(1636) 에는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순절한 백형(伯兄) 홍(泓)이 썼던 보검(寶劒)을 차고, 화순에서 의거하여 맹주(盟主)로서 의병을 이끌고 청주까지 올라갔다가 화친의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돌아와서 .. 2024. 4. 2.
송림속의 화순 송석정(松石亭) 송석정(松石亭)은 화순군 이양면 지석천변에 있는 건축물로 이름처럼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송림사이에 있는 정자이다. 강가에 튀어나온 기암괴석과 소나무, 대나무에 가려져 있는 등 풍광이 수려한 암석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화순 송석정(松石亭) 양인용(梁仁容,1555~1615)의 본관은 제주, 자는 여함(汝涵), 호는 송석정(松石亭)으로,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첨정을 역임하던 중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유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등 당쟁으로 인한 국정 혼란을 목격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곳에서 시문으로 벗들과 담소하며 유연자약하며 여생을 즐긴 곳이다. 이곳 송석정(松石亭) 편액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이며,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이었던 은봉 안방준(1573~1654)의 .. 2024. 4. 2.
명옥헌과 하심당 종택의 고매(古梅) 담양 명옥헌 원림(鳴玉軒 苑林)은 조선 중기 오희도(吳希道: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빨간꽃의 배롱나무군락으로 더 유명한곳인데, 오늘은 배롱나무에 밀려 존재조차 알아주지 않는 정자옆 고매를 찾아 본다. 그리고 창평면 장화리에 있는 홍주송씨 종택인 하심당의 매혹스런 "하심매"를 찾아 정자와 고택과 어우러진 고매의 향과 멋을 느껴보고자 한다. 명옥헌 분홍매 그윽한 향기가 온천지에 가득하다 이제 막 예쁜 봉오리를 터뜨리는 명옥헌매 수형도 좋고 엄청 오래되고 크다 동백과 분홍매와 정자 빨간 여름을 기다리는 배롱나무 명옥헌 입구의 샛노란 수선화 하심당 종택 입구의 큰개불알꽃 군락지 400년 종택 하심당(下心堂) 입구 표지판 하심매의 크고 아름다운 자태 후손 송영종씨가 관리하고 있는홍주송씨 .. 2024. 3. 18.
송강 정철의 환벽당(環璧堂) 고매(古梅) 환벽당은 광주호상류 창계천가 언덕위에 있는 정자로 명승 제107호이다. 이 정자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건립하였으며 환벽이라는 이름은 푸름이 사방에 둘렀다는 뜻이며, 편액은 송시열의 글씨다 환벽당 분홍매 송강 정철이 14세때에 김윤제를 만나 27세가 되어 관직에 나갈때까지 환벽당에서 유숙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훗날 정철의 후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이 정자를 사들였다. 산수유와 분홍매 매화와 산수유가 향기가 코를 즐겁게하는 참 좋은 계절이로다 2024. 3. 18.
삼우당 문익점의 도천서원과 사적지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신안사재는 경남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 고려 때의 문신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선생의 사적지이기도 하다. 1461년(세조 7)에 나라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하였고, 1787년(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문익점 사적지(도천서원,신안사재,묘소) 입구의 문익점 신도비각 도천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91년(고종 28) 단성(丹城) 사림(士林)들에 의해 노산정사(蘆山精舍)란 이름으로 유지하다가 1975년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삼우당 문익점선생 사적지 표지석 삼우당 선생 사후 조.. 2024. 3. 13.
"이화에 월백하고"이조년의 산청 안곡서원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 하야, 잠못드러 하노라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밤은 깊어 삼경인 때에 나뭇가지에 깃들여 있는 봄의 정서를 소쩍새야 알리가 있으랴마는 다정한 것이 병처럼 되어서 잠을 못 들고 있노라.) 이 유명한 시조는 고려 충신 문열공 이조년(梅雲堂 李兆年,1269~1343)의 다정가(多情歌)인데, 오늘 그 주인공의 유적지를 찾아 산청으로 떠난다. 안곡서원(安谷書院) 입구 표지석 안곡서원(安谷書院)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서원으로 이장경, 이조년, 이포, 이인립, 이제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하면서 강학(講學)도 하는 사당 겸 서당의 기능을 갖는 건물이다. 1913년에 강당이 .. 2024. 3. 13.
거창 동계종택(桐溪宗宅)과 반구헌(反求軒) 거창 동계종택(居昌 桐溪宗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鄭蘊)이 태어난 집으로 1820년(순조20)에 중창(다시 지음)하였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 가옥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거창 동계종택 사랑채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이며, 조선 중기 문신이며, 시호는 문간(文簡) 이다.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경칩이 지났는데도 설산인 금원산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사서·정언 등을 역임, 1614년 부사직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에서 10년간.. 2024. 3. 6.
중수(重修)한 김천 도동서원 김천 구성면 상좌원리(도동)에 있는 김천 도동서원(金泉 道洞書院)은 1648년(인조 26) 연안이씨 문중에서 상좌원리의 현조이자 불천위인 충간공 이숭원(李崇元,1428~1491)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2021~2023년에 걸쳐 중수한 김천 도동서원 명례당(明禮堂,강당) 1771년(영조 47) 현 위치로 이건하면서 이숭원을 불천위로 하여, 정양공 이숙기와, 1796년에는 예조판서를 지낸 문희공 이호민을, 다음 해는 눔장공 이숙함과 문청공 이후백 등 5명을 배향하였다. 서재 도동서원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8년에 파리장서사건(1919년)의 김천 유림대표로 서명한 독립운동가 이경균의 주도로 명례당(명륜당)을 중수하였었는데, 이후 거의 허물어졌으나, 2018년 .. 2024.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