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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222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74)두시언해 서문 두시언해(杜詩諺解)는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의 시를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시집이며 국문학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원래 이름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로 ‘공부’는 두보의 벼슬 이름이고 ‘분류’는 시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여 실었다는 뜻이다. 이 두시언해는 초간본(初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이 있으며, 초간 '두시언해'는 1443년(세종 25) 4월에 착수, 38년 만인 1481년(성종 12)에 비로소 간행된 한국의 첫 역시집(譯詩集)이다. 세종 ·성종 때에 걸쳐 왕명으로 승려 의침(義砧)을 비롯하여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등이 주해하였으며, 서문(序文)은 수찬(修撰) 조위(曺偉)가 썼다. 당시 두시(杜詩)에 통달한 사람은 신분과 .. 2020. 7. 5.
매계 조위선생의 생애(하) 매계 조위선생이 45세되던 1498년(연산군 4년) 2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어 성절사(聖節使)가 되었다. 4월에 출발하는데, 홍 허백(귀달)이 송서(送序)를 지어 송별하였으며, 서제인 조 신(曺伸)이 수행하였다. 5월에 압록강을 건너서 6월 8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성절사란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의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 또는 그 사신을 말한다. 그 해 7월에 유자광(柳子光)이 사옥(史獄)을 일으키고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반역을 꾀할 뜻이 있다고 하였다. 연산군은 평상시에도 선비들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참언(讒言)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점필재를 대역죄인으로 논죄하고, 즉시 부관참시(副棺斬屍)하고, 김일손(金馹孫)등을 극형에 .. 2020. 6. 3.
매계 조위선생의 생애(중) 매계 조위선생이 28세되던 1481년(성종12년) 3월, 원접사(遠接使)인 강희맹(姜希孟)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그 해 8월, 반송사(伴送使)종사관으로 사명을 받고 관서(關西)지방에 갔다가 황해도를 지나며 변경고을의 농사를 두루 살폈다. 12월, 금산(김천)으로 귀성했다가, 왕명을 받들어 두시서(杜詩序)를 지어 올렸다. 1482년(성종13년) 4월에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조위(曺偉)와 김흔(金訢)은 둘 다 진용(進用)한 자이니, “한 계급을 올려주라” 고 명하셨다. 7월에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8월에 사직서를 올리고 귀근하였다. 성종은 시강원(侍講院)을 설치하고 조위를 문학(文學)에 임명하였으며, 10월에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반송사 종사관이 되었다. 이 때 전당(錢塘)사람인 갈귀(葛.. 2020. 6. 1.
매계 조위선생의 생애(상) 매계 조위선생은 1454년 7월 10일 김천 봉계에서 출생하여 1503년 11월 26일 유배지인 순천에서 50세를 일기로 작고하기까지 참으로 파란만장한 영욕의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선생의 생애를 상(1~27세). 중(28~44세). 하(45~51세) 세편으로 나누어 감히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매계(梅溪) 조위선생(曺偉先生)은 1454년 7월 10일 김천 봉산면 인의동(봉계리) 극락산 동편기슭 율수재(구거)에서 태어 났으며, 어릴때의 이름은 오룡(五龍)이었다. 선생은 5세가 되면서 말을 배우자마자 곧 글자를 알았으며 7세때에 이미 시를 지을줄 알았고, 학업이 나날이 발전하여 모두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으며. 이해에 아버지인 조계문(曺繼門)은 현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1461년 선생이 8세되던 해 .. 2020. 5. 31.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72)김첨지(자완)의 시에 차운함 이 시는 매계 조위선생이 말년에 유배지인 순천의 옥천변 어디쯤에서 쓸쓸히 홀로 방안에 앉아 한잔술로 시름을 달래며 소리를 질러보다가, 조용히 지난날들을 회고해보기도 하고, 옛 붕우들과 한양에서 동고동락했던 일들을 돌이켜보기도 하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소회를 읊은것 같다. 김 첨지(자완)의 시에 차운함 -次金僉知(自完)韻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관직에 있던 시절 돌아보니 자취 이미 오래되었고 세상 물정에 초연하니 마음이 깨끗해지고 진실해 진다. 문을 걸어 잠그고 홀로 앉아 있으니 봄은 고요하고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 하니 백발도 새롭구나. 回首班行跡已陳(회수반행적이진) 超然物外任淸眞(초연물외임청진) 閉門獨坐靑春靜(폐문독좌청춘정) 對酒高歌白髮新(대주고가백발신) 서울의 원로 모임에는 이 늙은이.. 2020. 5. 28.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71)상주목사 유문통에게 매계 조위선생은 유문통(柳文通, 1438~1498)이 상주목사로 나갈 때 떠나는 송시를 써서 보내 주었는데, 때는 1495년 전후로 보인다. 유뮨통의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관지(貫之), 호는 괴정(槐亭)이다.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세자시강원필선, 부교리, 승의(承議), 예산현감, 이조정랑, 괴산군수, 상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496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문의(文義)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으며, 죽은 뒤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상주목사 유관지(문통)에게 행권을 보내다 (尙州牧師 柳貫之(文通)送行卷)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궁궐의 관리가 되지못해 가을바람에 오마는 상주를 향하네. 재주와 명성은 오래전에 선배들을 뛰어넘고 여론은 이구동성으로 높은 반열에.. 2020. 5. 28.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70)신차소가 옥당으로 돌아감을 축하하며 매계 조위선생은 "신차소가 옥당으로 다시 돌아가는것을 축하한다는 시" 를 지어 그에게 보내주어 축하하였다. 당시에는 자리를 옮기거나 영전할 때에 친한 사람끼리 시를 지어 역마를 통해 서로 보내주거나 받고 하는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 시는 1491년 신종호가 대사헌으로 있을 당시 북쪽 오랑캐 침입 사건에 관한 어전회의 중에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면되어 마음고생을 하다가 그 뒤 다시 등용되어 입궐하였는데, 이 때 매계선생은 충청도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때, 축하시를 지어 보내준것 같다. 신차소가 다시 옥당으로 돌아가는 것을 축하하며 (賀申次韶復入玉堂)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손에 야광주를 들고 규성에서 내려와 인간 세상의 빛나는 신선이 되었네. 붓끝의 무지개는 태양을 나란히 꿰고 가슴속에.. 2020. 5. 24.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9)박익부의 시에 차운함 아래 두편의 시는 그 내용으로 보아 매계 조위선생이 지방의 관찰사로 재임하는 시절에 읊은 시인것 같다.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어 가고 귀밑에 흰머리는 자꾸 늘어만 가는데 공무에 바빠 한가로이 시도 짓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과 지방에서 근무하며 겪는 여러 고충들이, 지난날 궁궐의 임금곁에서 근무하던 때의 추억들과 뒤썩여 회한과 아쉬움들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박익부의 시에 차운함(次朴益夫韻)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객지에서도 당당히 계절은 변화를 재촉하고 제비와 기러기가 구름 속에서 슬피 우는 소리에 깬다. 화창한 봄빛은 길가 버드나무를 푸르게 물들이고 꽃 소식은 시냇가 매화나무에서 먼저 알려온다. 客裏堂堂節序催(객리당당절서최) 夢驚燕雁叫雲哀(몽경연안규운애) 韶光欲染街頭柳(소광욕염가두류) 芳信.. 2020. 5. 20.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8)속리산 수정봉탑에 오르며 수정봉은 법주사를 에워싸고 있는 속리산의 천왕봉을 비롯한 여러 봉우리중 하나인데 현재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이 서 있는 바로 뒤 산봉우리로 높이는 566m이다. 매계 조위선생은 수정봉에 올라 오래된 탑을 둘러보며 당시의 풍광과 감회를 한편의 시로 남겼는데 아마도 1494년 충청도관찰사 재임시 속리사(법주사)에 들렀을때 안개속을 뚫으며 학을타고 정상에 올라 선경에 온듯 비경을 감상하며 이 시를 읊은것 같다. 그 옛날 매계선생이 노래했던 구름위로 오른 수정봉의 탑은 흔적만 남겨놓아, 전설속에서 그려볼 뿐이다. 수정봉 탑에 오르며(登水精峰塔)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우뚝 구름위로 오른 오래된 탑 亭亭古塔入雲端(정정고탑입운단) 손으로 잡고 올라 돌난간에 기댄다. 引手擧登倚石欄(인수거등의석란) 움푹.. 2020. 5. 15.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7)수영의 수각에서 짓다(題水營水閣) 수영의 수각에서 짓다(題水營水閣)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만경창파는 위아래로 넘실거리고 화당은 북두성과 견우성 곁에 있는 듯 누워서 새벽달에 쇠기둥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고 일어나 맑은 바람에 채색 깃발이 가득한 것을 소리친다. 萬頃波涵上下天(만경파함상하천) 華堂疑在斗牛邊(화당의재두우변) 臥看落月搖金柱(와간낙월요금주) 起喚淸風滿彩旃(기환청풍만채전) 몇 척의 어선에서 빛나는 등불은 어둠 속에서 명멸하고 꼭두새벽부터 호각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진다. 신선들이 사는 땅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한가로이 노를 저어 찾아갈 것을 만년에 기약한다. 數點漁燈明乍暗(수점어등명사암) 五更畵角斷還連(오경화각단환연) 十洲三島知何處(십주삼도지하처) 一棹幽尋擬晩年(일도유심의만년) 2020. 5. 13.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6)보령 남포(藍浦) 남포현은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웅천면·주산면· 미산면·성주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로 백제시대에는 사포현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남포현으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 병마사 겸 판현사를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 현을 설치했으며 별호는 마산이었다. 1896년에 남포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포군은 폐지되고 보령군에 편입되어 남포면이 되었다. 남포읍성은 서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위해 1390년(고려 공양왕 2년)에 처음 군영을 설치 축성하였고, 조선시대인 1451년(문종1년)에 석성을 건립하여 병마첨철제사를 두어 현사(縣事)를 겸하게 하였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진 성곽과, 성안 동북쪽에는 관아문과 진서루(鎭西樓), 동헌건물이 남아 있으며,.. 2020. 5. 7.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5)친필 시(親筆 詩) 이 글은 조위선생(曺偉 先生)이 읊은 수많은 시 중에서 직접 써서 남아있는 유일한 친필 시가 아닐까 한다.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외직에 나와 있을 때 성종임금께서 아프다는 소식과 또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의 놀랐던 마음과, 기쁜 마음을 글로 써서 남긴것으로 보인다. 오래전부터 찬성공파 족보에 올라 있었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중, 이번에 조지환(曺智煥) 우졸당 종회장이 한학자 지인을 통하여 어렵사리 번역하였기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올리게 된것이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유선의 깃발과 부절이 하늘에서 내리니 儒仙旄節下靑冥(유선모절하청명) 멀리 해를 잡고 지극한 정성 의지하네. 遠搏扶桑仗至誠(원박부상장지성) 만리에 고생하니 해가 솟은 듯 하였고 萬里間關廓日出(만리간관확일출) .. 2020. 5. 3.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4)속함(速含,현 함양)에서 속함은 현재의 경남 함양군일원으로 본래 신라의 속함군(速含郡, 또는 含城郡)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천령군(天嶺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허주(許州)로, 도단련사(都團練使)로, 함양군으로, 또 합주(陜州)에 예속되었다가 다시 현으로 강등되어 감을 두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396년(태조 5)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위성면이 되고, 1957년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속함의 지명유래는 함성과 같은 뜻으로 지리산 동쪽 기슭 산간분지의 지형적 특색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전설에 의하면 함양읍내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함양상림(咸陽上林)은 최치원(崔致遠)이 천령군 태수로 있을 때 홍수를 막기 위하여 심은 것이라 한다. 매계 조위선생은 1484.. 2020. 5. 2.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3)순천 개운산 동화사 순천 동화사는 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개운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선각국사 도선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고 전헤지고 있다. 또한 1047년(고려 문종 1) 의천이 두타행을 닦을 때 석장을 짚고 남유하다가 제석산 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활짝 열리는 것을 보고 개운산이라 하고, 구름이 일어난 곳에 봉황이 오동나무 둥지에 알을 품으려 날아드는 듯한 기운을 받아 절을 짓고 동화사라 불렀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에 법홍이 향로전을 지었고, 1696년(숙종 22) 계환이 법당·선당·정문루·요사채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선당·범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순천동화사 3층석탑은 보물 제831호이며, 의천의 속장경판본 135판도 남아있다. 매계 조위선생이 순천의.. 2020. 4. 28.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62)김제 금구에서 금구는 김제시에 속한 금구면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 백제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전주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의종(毅宗) 24년에 이의방(李義方)의 외향(外鄕)인 까닭으로 현령으로 승격시켰고, 조선조에서는 그대로 하였다. 금구현은 동쪽으로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북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8리, 남쪽으로 태인현(泰仁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서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매계 조위선생이 전라도 금구현을 순례한것은 1496년 늦가을이었다. 당시 금구현의 동헌과 객사는 흔적을 찾을길 없는데 아마도 현재의 금구면사무소가 있는 자리로 보인다. 이곳에도 향교는 인근에 남아있어 어렴풋이나.. 2020.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