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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222

매계 조위선생의 한시기행~(77)순천 계족산 정혜사에 자며 매계 조위선생의 "정혜사에 자며(宿定慧寺)" 라는 시(詩) 제목의 정혜사는 순천시 서면 청소리 계족산(鷄足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 말 보조국사 체징선사(804~880년)가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인 선조 20년(1592)에 소실되어 흔적만 남아있는 것을 임진왜란 이후에 신욱스님이 정사년(1671년, 광해군 9년)에 법당 3칸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대웅전 상량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웅전은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804호로 지정되어있다. "정혜사(定慧寺)에 자며" 라는 매계(梅溪) 선생의 이 시(詩)는 적암 조신(曺伸)의 소문쇄록에도 나와 있는데 언제 지은 시 인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시의 셋째구절에 "백목련이 담을 따라 피어있다" 하였으니 아마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2021. 1. 13.
적암 조신의 소문쇄록 ~ 8)병신년에 김종직이 선산부사가 되어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성화(成化) 병신년(丙申年,1476년)에 군수가 되기를 청하여 선산부사가 되었다.그때는 공(公,김종직)이 큰 병을 앓고 난 뒤라 말을 타기가 불편하여 내(조신.曺伸)가 모시고 배로 갔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성화제의 연호이며,성화 병신년은 1476년으로 성화 12년이며, 조선 성종 7년이다.  여주에 이르러 닻을 내린 뒤 미복(微服)을 입고 청심루에 올라가 시판(詩板)을 보고 있자니, 누구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서 김생원의 행차라고 대답하였다.이윽고 내려오니 날이 저물어 이미 어두웠으므로 신륵사에 투숙하려고 했는데, 절의 중이 삼문 밖에서 재를 올리면서 잡인을 소리쳐 쫓아내는 바람에, 공(公)이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배로 돌아와서 시 두 편을 읊었는데, 한 .. 2021. 1. 10.
적암 조신의 소문쇄록 ~ 7)신축(辛丑, 1481)년 봄에 지금부터 꼭 540년전인 1481년 신축(辛丑)년 봄에문량공(文良公) 진산 강희맹이 중국 사신의 원접사가 되었를 때다. 매계(梅溪)가 종사관이었는데 관서지방에 이르러 창화(唱和)한 시가 매우 많다.공(강희맹, 姜希孟,1424~1483)이 매계(梅溪)를 희롱하여 절구 시를 지었는데, 그대 마음은 바람에 휘날리는 버들개지요저의 마음은 소반 위에 놓인 구슬이어라.구슬은 굴러도 소반위에 있건만버들개지 날리면 종잡을 수 없어라. 또 구화봉이 꺽이고 대동강이 막히니원앙단꿈 깨어나 천지신명 찾는데때마침 찾아온 어디 사는 남자 이길래온갖 교태 다 지으며 옛 님을 유혹하나. 또붓을 들고 비단 속옷에 천만자를 휘두르니한 자 한 획이 가슴에 점을 박았네.먹자국이 낭군의 마음을 함부로 바꾸지 못해도 진시황이 불사른 공적은 비.. 2021. 1. 7.
창녕조씨 찬성공파와 성씨, 족보 이야기 ◎◎공파란 같은시조 아래의 한 종파만을 일컫는 말이다. 공파에 앞서 성씨(姓氏)를 알아야 하는데, 성씨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거나 한 혈통을 잇는 겨레붙이를 가리키는 가족용어 또는 칭호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성씨의 역사가 가장 오랜 민족은 중국인데 그와 이웃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를 모방한 한자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역사의 고비마다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기존의 성이 분열하여분관· 분파작용을 하였는가 하면 소멸되기도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창녕조씨 족보(병오보,丙午譜) 처음은 삼국시대의 왕실·귀족순으로 수용되어 왔지만대체적으로 한국적 성씨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 초기로 본다.이러한 성씨체계가 정착된 후에도, 자손들이 점점 번창하여지.. 2021. 1. 2.
적암 조신의 소문쇄록 ~ (6)지리정보(地理情報) 작암 조신(曺伸)선생은 소문쇄록에서 시.화(詩.畵), 야사(野史)외에도 중국(7회)과 일본(3회)을 여러번 순행하면서 얻은 많은 경험과 지식들을 바탕으로명나라 연경(중국, 북경)까지와, 유구국(오끼나와)까지의 거리,지리,지형등에 관해 상세하고도 유용한 기록들을 남겼다.지금부터 510여년 전인 1510년, 바닷길까지도 하나하나 거리로 계산했던그 엄청나고 신비스러운 기록들을 역사속에서 하나하나 만나본다. 1.국내 지리고려시대에는 은으로 만든 병(甁)으로 돈을 삼았다.이름을 활구(濶口)라 했다. 우리나라 지형을 본 떠서 이른 것이다.요즘(1510년대)은 활구를 쓰는 제도를 볼 수 없다.대개 우리나라 지세가 협소하면서도 길다. 왕도(서울)에서 남쪽으로 장흥까지는 구백칠십오리(五里, 390km)요, 북쪽으로 강계.. 2020. 12. 29.
적암 조신의 소문쇄록 ~ (5)충간공 조석문(曺錫文) 적암 조신(曺伸)의 소문쇄록에 충간공 조석문에 대한 일화가 있다.조석문(曺錫文)은 매계 조위선생은 물론 조신에게도 5촌 아저씨가 되며어릴 때 서울 집에 데려다 놓고 학문을 손수 가르치신 분이다.찬성공파 파조이신 찬성공 조경수(贊成公, 曺敬修)는 슬하에 3형제분을 두었는데첫째는 조혼(曺渾)이고, 둘째가 조항(曺沆), 셋째가 김천 입향조이신참의공 조심(參議公 曺深)인데, 조석문은 둘째인 조항(曺沆)의 아드님이고매계와 적암은 셋째인 조심(曺深)의 손자(부는 조계문)로 5촌간(종숙)이 된다. 소문쇄록에 의하면충간공 조석문(曺錫文)은 사람됨이 조심스럽고 삼가며 맑고 간소하여세조에게 두터운 총애를 받았는데, 세조는 호조와 나라의 정책을 그에게 맡겼다.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떄 비록 장수로서의 지략에 익숙.. 2020. 12. 27.
적암 조신의 소문쇄록~(4)단종, 수강궁에서 왕위를 물려주다 적암 조신(曺伸)의 소문쇄록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다른 기록물에는 남아있지 않은 많은 야사(野史)들이 실려있는데,단종이 페위될 당시의 생생한 모습들과 애닲은 사연들을 옮겨본다.  노산군(단종)이 수강궁에서 왕위를 물려주었다.어두운 밤에 횃불이라고는 없고 단지 오십여 인이 종루거리를 돌아갔다.주위 행랑에 사는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모두 곡을 했으나그치게 하거나 금하지 않았다.  마침 윤훈(尹壎)이 사금(司禁)이 되어 나에게 들려주기를노산군(단종)이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뒷날 영월에서 스스로 슬픈 노래를 지었는데, 달빛 낮게 드리우고 두견새가 울 제에누각 끝에 기대노니 님은 더욱 그리워네 울음, 나에게 슬프게 들리지 않음도 괴롭지만너의 울음, 내 슬픔을 알릴 수 없음이 더욱 애달퍼슬픔에 쌓인 세상 사람들에게 알.. 2020. 12. 24.
적암 조신(曺伸)선생 ~ 3)소문쇄록(謏聞瑣錄) 소문쇄록(謏聞瑣錄)은 조선 성종 때의 역관이며 문인인 적암 조신(曺伸 1454~1529)이 자신의 다양한 지식과 경험, 관심사항을 자유롭게 기술해놓은 한편의 잡기집(雜記集)이다. 조신(曺伸)은 역관으로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세 번 다녀왔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연경(燕京)까지의 지리에 관한 것과 중국의 운하를 이용한 치수사업도 소개했으며, 유구국(琉球國, 현 일본 오끼나와 일원)까지의 경로와 제주도까지의 험란한 해로(海路) 및 그 사이에서 일어난 표류사건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다.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경계 및 고적에 관한 내용은 물론, 사신(使臣)들의 시(詩)와 조선의 외교에 대해 기술해 놓았으며, 특히 외국에서 들어온 많은 서적의 목록도 기재되어 있어,조선 초기의 외교.. 2020. 12. 16.
적암 조신(曺伸)선생 ~ 2)수난사 적암(適菴) 조신(曺伸)선생은 이륜행실도등 많은 저서와 시를 남겼다.그 중에서도  형(兄)인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이 유배를 간 이후에 집안에 닥친 많은 어려움과  고난들, 그리고 죄인의 집안이라드러내 놓고 불평이나 원망도 하지 못하며 참고 지내야만 했던 수많은 날들, 기록으로도 남길수 없었던 참담하고 애닲은 마음들을 시로 남겼다. 520여년전 우리 선조님들이 겪었던 그 고난의 세월들을 모두 다 알수는 없겠지만 이 시를 통해서 대충이나마 미루어 짐작해보고자 한다.  1.대풍가(大風歌)     적암(適菴)  조신(曺伸, 1454~1529) 큰 바람 불어옴이여! 산 속 나무 부러지네.              맹수 부르짖음이여! 산 속 돌 찢어지네.                  남아 태어났으면 명당을 .. 2020. 12. 13.
적암 조신(曺伸)선생~1)생애(生涯) 적암(適菴) 조신(曺伸,1454.8.15.~1529)은 매계 조위선생의 동생으로자는 숙분(叔奮)이요, 호는 적암(適庵), 시호는 효강공(孝康公)이다.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조계문(曺繼門)이며.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매형이다.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7.10.~1503)는 조신(曺伸)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형이다.매계 조위는 조계문(曺繼門)의 적실(본부인)에서 태어났으며, 적암 조신은 측실(첩)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은 적자(적실소생)와 서자(측실소생)의 차별이 엄중하여서자로 태어나면 교육은 물론 벼슬길에도 나가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라났으며교육은 물론 벼슬길에 올라서도, 또 순행을 할 때에도 평생을 그림자처럼 함께하며 우애 깊게 지냈다.  .. 2020. 12. 12.
2020의 간략한 묘사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우리 주변의 생활관습과 문화등 모든 부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중 조상을 모시는 묘사도 예외는 아니다. 각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계하다보니 음식도 간소하게, 사람들도 최소한으로 모여 제례를 모시게 되었다. 경주 안강의 시조묘사도 임원진 20여명만 참여하여 모셨고, 각 파 종중묘사도 최소한의 종원만 모여 모시게 되었다. 관혼상제뿐만 아니라, 종교, 모임, 학교, 예술분야등 어느것 하나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조심조심하며 간략하게 형식만 갖춘다. 울진공과 문장공(매계)이하 선조들의 시제는 마암재에서 청사재로 봉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밥,갱(국),탕,나물,전등을 생략하고 떡(절편)도 조금만 하여 간략하게 준비하였고, 제관들도 서울,부산,거제등 타지역.. 2020. 11. 26.
2020 경북선비문화 김천포럼의 매계 조위 2020년 11월 14일 10시, 김천대학교 본관 5층에서는 김천유도회 주관으로 "2020 경북선비문화 김천포럼"이 열렸다. 이 포럼의 제1부 기조강연에서는 "강안학으로 본 김천 유교문화와 그 특성"이란 주제로 경북대학교 정우락교수가 강연을 하였고, 제2부 개회식에 이어, 제3부에서는 학술발표가 있었는데 제1발표자는 "18~19세기 낙동강유역 시사조직과 시화자료 연구" 라는 주제로 (부제는 "죽우시사집 및 시화집 2종을 중심으로") 한국국학진흥원 김주부 전임연구원의 학술발표와 황만기 안동대학교 학술연구소 대우교수의 토론문발표가 있었으며 제2발표자는 "매계 조위의 피화.복권과 역사적 평가"라는 주제로 이남옥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의 학술발표가 있었으며 토론문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김정운 전임연구원.. 2020. 11. 15.
제4회 매계문학상 시상식 . 매계 조위선생 학술대회 제4회 매계문학상 시상식과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생 학술대회가 2020년 10월 21일 오후 3시 매계구거(옛집)인 율수재 앞 야외무대에서 열렸다. 김천문화원에서 주최하고 경상북도와 김천시가 후원하며 창녕조씨 문장공파 대종회에서 주관하는 이 행사는 코로나19 예방책의 일환으로 김천문화원 강당이 아닌 실외에서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치러졌다, 행사진행은 식전행사로 트럼벳연주가 있었고, 창녕조씨 문장공파 대종회장의 환영사, 시장을 대리한 문화홍보실장의 대회사에 이어 매계문학상 심사위원장인 호서대학교 교수이며 시인인 김종태님의 심사평을 들은 후, 매계문학상 본상과 향토문인상 시상이 있었으며, 시상식 다음 순서인 학술대회에서는 원광대학교 김창호교수의 "15세기 후반의 문학지형과 매계 조위"라.. 2020. 10. 21.
창녕조씨 창녕재실 일원재 창녕 일원재(一源齋)는 창녕조씨의 득성설화가 전해지는 화왕산 바로 아래 창녕읍 말흘리59번지(대지585㎡)와 같은 장소 58~2(대지902㎡), 두필지 450여평에 있는 창녕조씨의 재실이다. 1981년도에 서울화수회의 성금으로 좋은 뜻을 가지고 잘 지어졌었는데 그 뒤 대지및 건물의 소유권분쟁으로 등기를 하지못하고 있다가 2007년 소송에 승소하여 소유권을 회복한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모습은 보기 민망할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다. 일원재 (一源齋) 대문채가 있던 건물앞은 풀밭인데다 일부만 텃밭으로 이용하고 있고 기와도 깨지고 허물어져 곧 쓰러질 상황이다. 왼쪽건물은 지붕에 천막을 덮어놓고 있다 왼쪽건물 앞 모습 지붕은 전부 천막으로 덮여있고 건물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간판이 있다. 더 크게.. 2020. 9. 21.
매계 조위선생의 발자취를 찾아~(76)암행어사 이야기 암행어사 매계 조위(曺偉,1454~1503) 성종 임금은 성적이 문란하기로 유명한 임금이다, 하지만 백성들과 신하의 성적 문란은 엄격히 경고한다. 그것은 아버지는 흥청망청 술을 마시면서 아들에게는 금주하라는 말과 같다. 당시 매계 조위(梅溪 曺偉)선생은 여색을 멀리하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그는 성종 임금의 명을 받고 남쪽지방의 암행어사가 되어 길을 떠났다. 여러 달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조위는 산간지방과 평야지방의 성도덕이 판이하게 다른데 놀라 시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보은 속리산 근처 산속 집에서 여인과 함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조위는 부인에게 말했다. 방도 하나밖에 없는데 제가 밖에서 자겠습니다 라고 하니 "아니 괜찮습나다. 피곤 하실 텐데 어서 주무세요 저는 바느질하다 윗목에서 잘 태니까요.. 2020.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