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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천 조각환의 나들이 흔적

뿌리와 예의범절222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7.끝) 조위는 그 후 김굉필과 함께 호남 순천으로 이배됐다. 순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유배가사의 효시가 된 "만분가"를 지었다.국한혼용체 2음보 1구의 127구인 만분가는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안정복의 "잡동산이" 제44책에 수록돼 전하고 있다. 순천 유배 중 지어 유배가사의 효시가 된 "만분가"(한국 가사문학관 전시) 이 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가원으로, 1963년 세상에 소개했다.작품해제에 "조위 호 매계(曺偉 號 梅溪)"라고 작가가 소개돼 있다."만분(萬憤)"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매우 원통함"이다.그러므로 만분가에는 분하고 억울하고 괴로운 마음이 담겨 있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인간세계로 추방된 것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다. 한국 가사.. 2024. 5. 1.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6) 조위(曺偉)는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훈구파에 의해 조위, 김일손, 김굉필, 신종호, 정석견, 채수, 김전, 최보, 신용개, 권경유, 이계맹, 이주, 이원, 김심, 김흔, 표연말, 유호인, 정여창 등등 김종직의 제자들 명단이 작성됐다. 그들은 모두 의금부에 연행돼 모진 고문과 함께 거짓자백을 강요받았다.  고문 형틀 류자광과 훈구파가 원하는 자백은 김종직의 제자들이 조의제문에 대역부도의 뜻이 담겼음을 알면서도 찬사를 보내고 지지를 했다는 것이었다. 당사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관아 풍경 그러나 간접연루자들은 고문에 못 이겨, 혹은 회유에 넘어가서거짓자백을 했다. 훈구파는 그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을 근거로김종직의 제자들 상당수에게 대역부도의 죄, 그리고 김종직의유언에 따라 붕당을 이.. 2024. 5. 1.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5) 조위(曺偉)가 명나라에 가고 없을 때였다. 류자광은 연산군을 알현하고,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으려 하는데,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하다고 고했다.“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 ”연산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경복궁 근정전 측면 “세조조 때 있었던 노산군 사건에서 노산군을 초의제 회왕에 비유하고 세조조를 항우에 비유하여 세조조를 은근히 비난한 내용입니다.류자광은 "조의제문"을 펼쳐 구절마다 풀이해서 아뢴 후, “이는 세조조의 정통성을 훼손함으로써 주상의 정통성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글입니다. 경복궁 경성전(慶成殿) 지금 이 조정에 그의 문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번 일을 그냥 넘기시면 그들이 주상을 또 그렇게 비난하며 자기들끼리 공모하여 일을 꾸밀 것입니.. 2024. 4. 30.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4)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랴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 두만강파음마무(頭滿江波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이 시는 조위가 지은 것이 아니고, 세조대의 무신으로,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의 북정가이다. 가평 남이섬 1468년(예종 1년) 당시 병조참지였던 류자광(柳子光)은 자신이 넘을 수 없는벽처럼 느껴졌던 뛰어난 장수 남이장군의 "북정가"에서 미평국(未平國)을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고는, “남이(南怡)의 북정가에, "남아 이십의 나이에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랴" 라는 말이 있으니,이게.. 2024. 4. 30.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3) 조위(曺偉)는 1484년 서른하나에 연로한 아버지 봉양을 위해 자청(걸군)해서 함양군수로 나갔다. 홍문관저작 겸 세자시강원사경, 홍문관박사,부수찬, 영안도(지금의 함경도)경차관, 포쇄관, 시독관, 부교리, 시강원문학, 홍문관응교 등을 역임한 뒤였다. 함양 학사루 백성이 곧 하늘이다. 목민관 조위는 고을 백성들이 토지세를 균등하게 납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함양지도지(咸陽地圖志)" 를 만들었다.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실시해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를 권장했고, 학문을 일으켜 재주 있는 사람을 골라 가르쳤다."어질고, 용서하고, 간편하고, 검소하게"를 행정의 원칙으로 세우고 백성을 다스렸다.민본사상에 의한 위민정치의 실천이었다. 함양 향교 태극루 조위가 어떤 목민관이었는지는 함양군수 시절.. 2024. 4. 29.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2) 성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문장을 사랑한 임금이었다. 때문에 학자이자 문장가인 김종직을 총애했으며, 그 제자로서 문장이 웅위하고 화려한 조위도 총애했다. 조위는 훈신 조석문의 당질이었고, 대유 김종직의 문도요, 거기에다 임금의 총애까지 더해져 그 배경은 화려했다. 경복궁 근정전 용상 그러나 관직생활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화려한 배경이 오히려 동료 관원들의 시기를 사서 독이 됐기 때문이다.조위는 1454년(단종 2년) 김산군 파미면(현 김천시 봉산면)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태허(太虛)이며, 호는 매계(梅溪)이다. 매계구거(梅溪舊居) ~ 매계 조위의 생가 창녕 조씨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인 조계룡이 시조이다.중시조는 태조 왕건의 사위 조겸이며, 김천 입향조는 조심(曺深)으로, 좌찬성 조.. 2024. 4. 29.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曺偉) ~ 1) 이 글은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에서 2020년 8월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조위~ 라는 제하에 3회로 나누어 게재한 내용을 사진 등을 추가하고 일부내용을  편집하여 7회로 나누어 올립니다. 울진 월송정 1467년(세조 10년), 울진 바닷가 갯바위에 한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년은 처음 보는 바다가 마냥 신기해서 물비늘 반짝이는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그런 소년을 또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동해바다 제법 시간이 흘러 무료해질 무렵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어머니가 소년의 무릎 위에 얹힌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으며 말했다.“이제 가면 언제 다시 바다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질 않습니까.볼 수 .. 2024. 4. 29.
죽림 조수문의 담양 죽림재 홍매 담양 죽림재(竹林齋)는 무등산에서 발원해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수남학구당, 관수정, 동강조대, 창평향교 등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품고 영산강으로 흐르며, 조선의 선비 문사들에게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했던 유서 깊은 증암천 옆 향백산 아래 고서면 분향리 잣정마을에 있다. 담양 죽림재 홍매 이곳 분향리 잣쟁이 마을은 창녕조씨(昌寧曹氏) 집성촌으로 원래 죽림재는 죽림(竹林) 조수문(曺秀文,1426∼?)이 건립한 정사(精舍)로서 대대로 창녕조씨 문중의 강학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처음 건물은 임진왜란시 귀중한 문서와 함께 소실되었고, 1623년(인조1)에 죽림의 6대손인 삼청당(三淸堂) 조부(曺簿)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죽림재 전경 그후 죽림과 그의 아들인 운곡(雲谷) 조호(曺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 2024. 3. 17.
남명 조식의 남명매와 기념관, 묘소 매화의 계절을 맞아 매화향기따라 탐매여행에 나선다.지리산 자락의 산청 3매 중 남사예담촌의 원정매와 단속사지의 정당매는고사한지 이미 오래이고, 지금은 옆의 후계목들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있다.오직 산천재의 남명매만이 살아 남아서 고매(古梅)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 남명매는 실천 유학의 대가 남명 조식(曺植,1501~1572)선생이 61세이던명종 16년(1561년)에 산천재를 짓고 앞뜰에 매화를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대략 460여년이 지난 고매(古梅)인데, 산천재 앞뜰에 서면 지리산 천왕봉이 한 눈에 들어와 해마다 많은 매화 탐방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산천재 입구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산천재를 지은 후 후학들을 가르쳤으며,1572년 2월 8일 72세를 일기로 이곳 산천재에서 운.. 2024. 3. 13.
매계 조위선생의 매화 한시(漢詩) 때는 바야흐로 상큼한 매화향이 코끝을 스쳐가는 매화의 계절이다. 이때쯤이면 성리학의 대가 매계 조위(梅溪 曺偉)선생의 숨결이 녹아있는 매화 한시(漢詩)를 되새겨 보며 짙은 매향속으로 젖어들게된다. 매조(梅鳥) ~ 매화와 동박새 대매야독주역(對梅夜讀周易) ~ 매화를 대하며 밤에 주역을 읽다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인적 끊긴 조용한 밤 홀로 문을 걸고서 / 야정인한독폐문(夜靜人閑獨閉門) 안채에서 등불을 짝하여 주역을 읽는다 / 반등간역대유헌(伴燈看易對幽軒) 글을 읽느라 매화 지는 줄도 몰랐는데 / 독래불각매화락(讀來不覺梅花落) 책상머리에 사뿐히 내려앉은 하얀 흔적 / 비박상두점소흔(飛撲床頭點素痕) 통도사 설중매 붉은 매화 족자를 제목으로 (題紅梅畫簇) 매계 조위(梅溪 曺偉,1454~1503.. 2024. 2. 13.
창녕조씨 5대 대동보 족보서(昌寧曺氏 族譜序)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고려왕실의 계통을기록한 것으로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1476년(조선 성종7년)에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있다.이후 1565년(조선 명종 20)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게된다. 창녕조씨(昌寧曺氏)도 이전에 가문별로 가승보는 있었으나대동보가 간행된것은 1606년(선조 39)에 조탁(曺倬)이 친필로 간행했다는병오보(丙午譜)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당시의 족보를 접하기는 쉽지 않으나 그 서문.. 2024. 1. 19.
독립운동가 조성환의 여주 보통리 생가 독립운동가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녕, 호는 청사(晴蓑)이고, 다른 이름은 조욱(曺煜,曺旭)이다. 대대로 조선시대의 고관대작을 두루 역임한 명문대가 집안 출신으로, 한 집안에서 다수의 인재들을 탄생시킨, 모두가 부러워 했던 그 고택을 찾아본다. 여주 보통리 조성환 생가 이 고택은 경기 동부지역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임진왜란때 조성환의 11대조인 조경인(曺景仁)이 전란을 피해 외가인 무송 윤씨의 터전인 이곳 보통리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 순조 13년인 1813년 이조판서를 지낸 조윤대(曺允大)와 역시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그의 아들 조봉진(曺鳳振)이 건립하여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였었다. 큰 사랑채(왼쪽)와 작은 사랑채(중.. 2024. 1. 17.
중종이 청백리 조치우에게 내린 옥비(玉碑)이야기 조치우(曺致虞,1459~1529)는 조선전기에 정언, 대구부사, 예천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요 효자이며, 재임 중 선정으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중종(中宗)은 조치우(曺致虞)가 선정과 노모봉양의 효심 또한 지극하여 소학(小學)을 내리고, 1529년(중종 24) 그의 사후에는 청렴결백한덕을 표창하고자 옥으로 만든 옥비(玉碑) 두좌를 하사하였다. 영천 내사옥비각(內賜玉碑閣,2023.12.28) 그 한 좌는 조치우에게 내린 청옥(靑玉)으로 현재의 영천 대창면 대재리 송청산(松靑山) 유후재(遺厚齋) 안 내사옥비각에 안치되어있고, 다른 한 좌는 부인인 숙인 창원 박씨에게 내린 백옥(白玉)으로부인묘소가 있는 창원시 북면 지개동 구룡산(九龍山) 아래 모선재(추감재,追感齋) 옆 어사옥비각(御賜玉碑閣)에 안치되어있다. 어.. 2023. 12. 29.
상주 조우인선생 문학비와 낙동강 어풍대 이재 조우인(曺友仁,1561~1625)선생은 조선조에 선조, 광해군, 인조등 3대 임금을 섬기며 시, 글씨, 그림등 3절로 이름났던 선비였으며,특히 매호별곡(梅湖別曲)·자도사(自悼詞)·관동속별곡(關東續別曲)·출새곡(出塞曲) 등 4편의 가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거나 EBS 수능특강, 고교모의고사나 수능고사 등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상주 매호리 낙동강변에 있는 조우인 문학비와 어풍대 등을 둘러본다. 이재 조우인선생 문학비(頤齋 曺友仁先生 文學碑) 이재 조우인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頤齋)이며 예천에서 출생.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의 증손자이다.조우인은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고,160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1616년(광해군.. 2023. 12. 25.
창녕조씨 거제문중 방문기 한점 구름없이 맑고 화창한 12월 초순 창녕조씨 거제문중을 찾았다.거제문중은 송무(松茂) 13세(世)이며 매계 조위(曺偉)선생의 8세손인 조응상(曺應祥)을 입거조(入巨祖, 거제 입향조)로 하여사등면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며 거제 일원에서 번창한 창녕조문이다. 창녕조씨 거제종회 정충사(靖忠祠) 입구 창녕조씨 찬성공파 약보(昌寧曺氏 認齊公派 略譜)始祖 ①曺繼龍 ― ② 應神 ― ③ 壽享 ― ④ 敦 ― ⑤ 欽 ― ⑥ 謙 中祖 ⑥謙(高麗太祖駙馬) ― ⑦ 瑞 ― ⑧ 延祐 ― ⑨ 漢知 ― ⑩ 之賢 ― ⑪ 思詮 ― ⑫ 正鱗 ― ⑬ 仲龍 ― ⑭ 義文 ― ⑮ 自奇 ― ⑯ 允恭 ― ⑰ 碩 ― ⑱ 誼 ― ⑲ 挻文 ―⑳ 瑀 ― (21) 松茂 更起 ①世 송무(松茂) ― ② 俊 ― ③ 人取 ― ④ 元桂― ⑤ 遇禧 ― ⑥ 경수.. 2023. 12. 5.